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추축국으로 한 편에 서서 싸웠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 독일과 중국이 긴밀한 동맹 관계였다는 점은 다소 의외로 들릴 수 있습니다. 히틀러 정권과 일본 정부가 비슷한 이념을 공유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양국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나 통상을 넘어 군사 분야까지 깊숙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그늘에서 시작된 협력
독일과 중국의 유대는 히틀러 집권 이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은 연합국 측에 서서 독일 제국에 맞섰지만, 전장에서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습니다. 적대 행위가 끝난 뒤 양국은 관계를 회복했고, 바이마르 정부는 아시아 영토 내 소유권을 포기하며 1921년 상호 무역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중국은 독일 재건에 필수적인 원자재, 즉 주로 텅스텐과 안티모니를 공급하는 대신 현대식 무기와 군사 훈련을 제공받았습니다.
혼란의 시대, 극동아시아
당시 동아시아는 격랑의 시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황제가 물러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몇 년 뒤 세계대전 한복판에서는 러시아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27년에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쿠오민탕)이 공산당과 내전에 돌입했는데, 이 전쟁은 마오쩌둥의 최종 승리로 끝나는 1950년까지 수십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상황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옹립한 괴뢰국 만주국의 수립으로 한층 더 복잡해졌습니다. 6년 뒤에는 침략이 대규모로 확대되었지만, 기술과 물량 면에서 열세에 처한 중국으로서는 고도로 산업화된 일본 제국군에 맞설 뚜렷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 그리고 독일의 선택
도움이 절실했던 중국에 손을 내민 국가 중 하나가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은 중국산 원자재 공급을 잃고 싶지 않았고, 공산주의를 막아서는 방파제로 여겨지던 국민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달리 독일이 아시아에서 뚜렷한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는 점도 상호 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인의 해외 군사 활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풍부하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스무 명 남짓의 용병 장교들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중국판 웨스트포인트 혹은 샌드허스트라 불리는 황푸 군관학교의 핵심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유럽에서의 무기 반입이 조약 위반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직접 무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산업 인력들도 합류했습니다.
폰 제크트의 도착과 현대 육군 건설
1933년 선거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이러한 우회 방식은 끝을 맺습니다. 저명한 한스 폰 제크트 대장이 공식 고문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독일 국방군(베르마흐트)의 조직 체계를 모델로 삼아 현대적이고 기동력 있는 정예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총 8만 명으로 구성된 8개 사단을 설계했고, 이 부대는 상하이 방어전에서 일본 제국군에 맞서게 됩니다.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현실적 개편
중국에 파견된 또 다른 핵심 인물은 드레스덴 보병학교 교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었습니다. 그는 폰 제크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낡은 장비가 만연한 중국의 열악한 현실에 맞춰 계획을 과감히 수정했습니다. 기대치를 낮추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적진에 잠입해 활약했던 돌격대(슈투름그루펜)에서 영감을 받은 소규모 기동 부대를 육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무기 현대화의 박차
팔켄하우젠은 무기 현대화에도 힘을 실었습니다. 한양 병기창은 맥심 기관총과 '장제스 소총'(마우저 M1924의 중국형) 생산에 나섰고, 새로운 공장들이 들어서며 상징적인 M35 헬멧부터 마우저 C96 권총, MG34 기관총까지 다양한 장비가 생산되었습니다. 야포나 전차 같은 중장비는 독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소모전 전략의 성공
팔켄하우젠이 장제스에게 제안한 것은 소모전이었습니다. 황허(황하) 유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게릴라 부대를 운용해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일본군은 수개월간 진격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중국은 전쟁 산업을 쓰촨(사천) 내륙 깊숙이 옮길 소중한 시간을 벌었습니다.

함락 속에서 피어난 사기
결국 일본은 상하이와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76일간의 영웅적인 저항과 타이얼좡 전투(1938), 쉬셴자오양 전투(1939)에서의 승리는 갓 태어난 중국 현대군에게 커다란 사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베를린 대사관과 장웨이궈의 독일 유학
양국 관계는 그만큼 돈독했습니다. 장제스는 베를린에 대사관을 열었고, 심지어 양자인 장웨이궈를 독일로 보내 국방군에서 훈련받게 했습니다. 퓌러 히틀러 본인이 중국인을 결코 열등하다고 여긴 적이 없다고 공언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훗날 전세가 기울어 독일 정부가 도쿄와 동맹을 맺으면서 군사 고문들이 소환될 때에도, 새 동맹국에게는 어떤 정보도 넘기지 않겠다는 약속이 오갔습니다.
동맹의 종언
독일은 중국과의 관계를 정리하려 했지만, 중국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미국과 소련 등이 중국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이 낙타의 등을 꺾은 마지막 짐이 되었고, 중국은 추축국들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럼에도 폰 팔켄하우젠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잦은 서신 왕래를 통해 장제스와의 우정을 끝내 이어갔습니다. 한편 그의 양자 장웨이궈는 중위까지 진급하여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당시 전차 부대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이후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