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기도 전투는 1918년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에드먼드 앨런비(Edmund Allenby) 장군이 수행한 팔레스타인 정복 작전의 최종 승리였습니다. 그의 군대는 서쪽에서 이즈레엘 계곡을 돌파하여 계곡 일대와 요르단 강변에 주둔하던 오스만(튀르키예)군을 격파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종말의 전투 '아마겟돈'이 바로 이 계곡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많은 참호전 공세와 달리, 앨런비가 구사한 기동전은 인명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신속하고 유연한 작전 진행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격전(블리츠크리크)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후 자작 작위를 받은 앨런비는 이 전투의 이름을 따 '므기도의 앨런비 자작'이 되었습니다.
양측의 전력
오스만 제국군은 독일 장군 리만 폰 잔더스(Liman von Sanders)의 지휘 아래 제13군, 제7군, 제4군 등 세 개 군을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44,000명의 병사는 지중해 연안 야파 북쪽 내륙 지역에서 요르단 계곡까지 이어지는 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질병과 탈영으로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고, 보급 또한 심각하게 부족했습니다. 이는 영국 연락 장교 T.E. 로렌스(T.E. Lawrence)와 협력한 아랍 부대가 헤자즈 철도를 차단해 보급로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앨런비는 69,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공세의 개시
앨런비는 요르단 계곡의 오스만군을 상대로 양동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제 계획은 해안 지역에서의 결정적 타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병력 집결지와 보급창은 해당 지역에 위장되었고 가짜 야영지까지 건설되었습니다. 앨런비는 약 35,000명의 병력과 350문의 야포를 해안 방면으로 투입하여 8,000명의 병력과 130문의 포로 방어하던 오스만군을 공격한 뒤, 동쪽으로 선회하여 오스만 제7군과 제13군의 북쪽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습니다.
영국군의 공세는 새벽 4시 30분 시작되었습니다. 앨런비의 포병은 약 100km에 달하는 전선에 걸쳐 포격을 개시했고, 이어진 지중해 연안 공격으로 과도하게 늘어져 있던 오스만 방어선은 빠르게 돌파되었습니다. 이 돌파구를 활용한 것은 사막 기병부대로, 이들은 북쪽의 므기도 방면으로 진격한 뒤 요르단을 넘어 동쪽으로 선회했습니다. 동시에 영국군 항공기들이 오스만군의 철도와 사령부를 폭격하여 통신 및 보급망을 파괴했습니다. 사막에서 진입한 부대는 단 3일 만에 110km를 전진한 후 진지를 정비했습니다.
드제라드 파샤(Djerad Pasha)가 지휘하던 오스만 제8군은 포위 공격으로 사실상 궤멸되었고,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의 제7군은 동쪽으로 후퇴를 시도했습니다. 두 군 모두 영국군 항공기의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렸으며, 후퇴는 완전한 궤주로 변해 25,000명의 오스만 병사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요르단 계곡에 배치된 제4군 역시 다마스커스를 향해 북쪽으로 후퇴를 시작했지만, 앨런비 장군의 승리는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어떠한 오스만군도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그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과와 여파
눈부신 승리에 힘입어 영국군은 9월 30일 다마스커스에 입성하여 약 20,000명의 포로를 추가로 확보했습니다. 다음 날 베이루트가 함락되었고, 300km 북쪽의 알레포는 10월 26일 함락되었습니다. 진격의 선두에는 아랍 게릴라 부대가 앞서고, 제3호주 경기병대가 뒤따랐습니다. 아랍 게릴라 부대는 반란 아랍 마을에 대한 오스만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를 거의 잡지 않았는데, 9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약 15,000명의 오스만 병사(및 일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가 몰살당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