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상징하는 솜 전투: 배경부터 결과까지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는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로, 프랑스 북부 솜(Somme) 강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방전입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알베르(Albert), 페론(Peronne), 바폼(Bapaume) 세 도시가 이루는 삼각형 지역을 따라 남북 약 45km에 걸쳐 구축된 독일군 요새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이 전투의 첫날인 1916년 7월 1일은 영국군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하루라는 슬픈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사망자 19,240명을 포함해 총 57,47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전투는 선전 영화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를 통해 현대전의 참혹함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생생하게 보여준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솜 전투의 배경

공세 결정의 과정

플랑드르 지역 공세 개시는 1915년 12월 6일 샹티니(Chantilly) 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병력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면서, 특히 정치권의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이에 따라 1916년 1월 조프르(Joffre) 장군은 공세 지역을 피카르디(Picardy)로 변경했습니다.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이 베르됭(Verdun) 공세를 시작하자, 영국군 총사령관은 동맹국인 프랑스를 돕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 수뇌부는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신 다른 전선에서의 공격을 통한 견제를 요청했습니다.

서툰던 영국군의 상황

1916년 당시 프랑스 주둔 영국군은 심각한 경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정규군 여섯 개 사단이 이미 소진된 상태였고, 병력의 대부분은 영토군(Territorial Forces)과 키치너 신육군(Kitchener's New Army) 출신 자원병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장교들은 급속히 진급했지만 훈련과 실전 경험이 모두 부족했으며, 헤이그(Haig) 원수 본인도 초고속 진급을 거친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연합군 항공부대는 포커 스쿨지(Fokker scourge)를 극복하고 제공권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이 덕분에 적 관측기구를 격추하고 훨씬 우수한 정찰 능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독일이 새로운 항공기를 도입해 다시 제공권을 되찾은 것은 그해 9월이 되어서였습니다.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선

독일군은 고지대를 거의 모두 장악하고 있었으며, 방어선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제1진지: 제1선·지원·예비 참호로 구성되고, 모든 현대적 편의시설을 갖춘 깊은 은신처의 미로까지 갖춘 강력한 진지
  • 제2중간선: 야포 포병대를 보호하는 상대적으로 약한 방어선
  • 제2진지: 첫 번째 진지에 필적할 만큼 견고하게 구축된 후방 진지

그 뒤편에는 참호로 연결된 숲과 '요새화된' 마을들이 배치되어 제3, 제4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이 방어선 전체는 대규모로 콘크리트로 보강되었으며, 잘게 부수면 단단히 굳어지는 백악질 암석의 특성을 활용해 구축되었습니다.

양측의 전투 서열

영국군

롤린슨(Rawlinson) 장군이 제5군 예비대와 함께 지휘했습니다.

독일군

북쪽 영국군과 마주한 곳에는 폰 벨로(von Below) 장군의 제2군이 배치되었고, 그 좌익에는 바이에른 왕자 루프레히트(Rupprecht)가 지휘하는 제6군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과 마주한 산테르(Santerre) 지역에는 제4군이 배치되었습니다.

한편 캐나다군은 뉴펀들랜드 연대와 함께 7월 1일부터 겨울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들의 목표 역시 독일군이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 돌파였습니다.

전투의 경과

후방의 대변신

후방 지역은 도로, 철도, 항공 운송의 최고 성능을 활용하는 거대한 물류창고로 변신했습니다. 특히 380mm, 400mm급 철도포 같은 괴물들을 포함한 포병 화력은 파괴력의 정점에 달했습니다.

6일간의 폭격

공세 개시 전 6일간 독일군 방어선에 대한 집중 포격이 계속되었습니다. 목표는 만반의 준비를 무력화하고 모든 것을 초토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투 첫날의 비극

일주일간의 격렬한 포격 준비는 공세에 앞서 약 20,000명의 독일군 사상자를 냈습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 독일군은 후방 진지로 물러났다가, 포격이 끝난 직후 제1선을 재점령했습니다.

7월 1일 오전 7시 30분,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영국군 병사들은 참호에서 올라와 32kg에 달하는 장비를 메고 적진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일부 병력만이 정찰병으로 먼저 파견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독일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장교들은 쉽게 식별되어 특히 집중 표적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행진 대열을 유지한 채 다가오는 모습에 놀랐는데, 사실 영국군 지휘부는 병사들이 뛰면서 대열을 이탈하고 흩어질 것을 우려해, 포격으로 독일 방어선이 완파되었다고 확신하며 정렬하여 전진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정오에 이르러야 영국군 참모본부가 이 명령을 취소하고 후속 돌격 부대를 보류했습니다.

첫날 하루 동안 사망, 부상, 실종자가 60,000명에 달했으며, 이는 20세기 최악의 하루로 기록되었습니다. 영국군이 독일 참호에 도달했을 때는 반격을 막아낼 병력이 너무 부족했고, 뉴펀들랜드 연대와 같은 일부 부대는 91%가 소멸되었습니다.

7월 3일, 영국군은 콩탈메종(Contalmaison) 남쪽 마메츠(Mametz) 숲을 점령하며 진지를 안정시켰습니다.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수풀에서만 1,000명이 넘는 포로를 생포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성과

프랑스 제6군은 열흘 만에 거의 2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일부 지점 10km에 이르는 종심을 돌파했습니다. 임무로 부여된 플로쿠르(Flaucourt) 고원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이 고원은 페론 방어의 핵심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 없이 12,000명의 포로를 생포하고, 야포 85문, 박격포(minenwerfer) 26문, 기관총 100정과 막대한 물자를 노획했습니다. 이는 마른 전투 이래 가장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바폼 전선 강화를 위해 베르됭 전역에서 35개 사단이 차출되었습니다.

7월 20일~8월 말: 소모전의 지속

7월 마지막 주는 무겁고 먼지가 가득한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영국 예비군인 고ough(Gough) 군단은 포지에르(Pozières)의 요새 진지에 발판을 마련하고, 델빌 숲(Delville Wood)과 롱구발(Longueval)을 두 번째로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이상 계속된 치열한 전투 끝에 기유몽(Guillemont) 공략에는 실패했습니다.

9월~11월 중순: 전세의 전환

9월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전장은 진창으로 변했습니다.

9월 3일 공격 초기에 기유몽이 함락되었습니다. 이튿날인 4일에는 남쪽에서 프랑스 제10군이 드니에쿠르(Deniécourt)와 베르망도빌레르(Vermandovillers) 사이의 제1진지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수아에쿠르(Soyécourt)와 시이(Chilly)가 함락되며 2,70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리옹(Lihons) 방면에서 술란(Chaulnes)이 직접 위협받았습니다. 6일에는 프랑스 제1군이 베르니앙생테르(Berny-en-Santerre)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전차의 첫 실전 투입

9월 15일, 역사상 최초의 전차가 전장에 등장했습니다. 전차의 지원 아래 영국군은 쿠르슬레트(Courcelette), 마르탱퓌이(Martinpuich), 부레오 숲(Bois des Foureaux), 플레르(Flers) 마을을 함락하며 4,000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17일에는 제1군이 베르망도빌레르와 베르니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26일은 영광의 날이었습니다. 양 동맹국이 협공하여 바폼과 페론 사이의 '열쇠'라 불리는 콩블(Combles)을 함께 함락한 것입니다. 한편 북쪽 끝에서는 영국군이 지뢰 폭파 작전을 통해 티에프발(Thiepval)을 탈환하며 공세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전투의 종결과 결과

1917년 2월 24일, 독일군은 전략적 후퇴를 단행했습니다. 후방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방어선을 힌덴부르크 방어선(Hindenburg Line)으로 단축한 것입니다.

영토 획득은 미미했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의 준비 포격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솜 전투를 계기로 독일 최고사령부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결정했고, 이는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등을 거쳐 미국의 참전으로 이어지며 전세의 판도를 바꾸는 결과를 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