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한겨울의 대학살: 청천강에서 장진호까지, 유엔군의 참혹한 후퇴

한겨울의 대학살: 청천강에서 장진호까지, 유엔군의 참혹한 후퇴

1950년 늦가을,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져 거대한 구멍이 열린 듯한 상태가 되었다. 이 틈을 타고 중공군은 남쪽으로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청천강 방면으로 후퇴하던 유엔군 전 병력을 포위 섬멸할 위협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10일 만에 190km, 청천강에서 임진강까지

11월 28일, 미 제8군은 나날이 빨라지는 속도로 남쪽으로 내몰렸다. 여기에 후퇴 행렬에 합류하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길을 막으면서 철수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12월 5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마저 포기해야 했고, 12월 13일 유엔군은 단 10일 만에 190km를 후퇴해 임진강에 도달했다. 유엔군은 이곳에서 38도선을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보급 부족으로 멈춰 선 중공군의 진격

유엔군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중공군의 진격 기세가 충분한 식량 보급 없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중공군은 다음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며 각종 차량을 강제 징발했다. 짐수레, 손수레, 소, 짐말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식이었다.

장진호의 참극, 전례 없는 학살

북동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상황 역시 서부전선만큼이나 절박했다.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산하 해병대를 상대로 12,000명의 병력을 투입해, 자살에 가까운 파도식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밤마다 마을 곳곳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그야말로 전례 없는 학살이 반복되었다.

영하 18도까지 떨어진 한국의 혹한은 미군 소총들을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었지만, 브라우닝 중기관총만은 끝까지 가동될 수 있었다.

혹한이 앗아간 목숨들

무자비한 추위 또한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11월 30일 맥아더 장군이 제10군단에 철수 명령을 하달한 뒤, 방한 장비가 부족했던 일부 연합군 병사들은 흥남 항구로 향하는 길고 험난한 후퇴 도중 추위로 생명을 잃었다.

흥남 교두보와 하가루의 활주로

튼튼한 교두보로 재정비된 흥남은 중공군의 반복적인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흥남의 안보가 확보된 대신, 장진호(장진저수지) 지역에 고립된 제7보병사단 병력의 절반 이상은 더욱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 12월 2일, 저수지 남쪽 끝의 하가루까지 돌파에 성공한 1,000명 가운데 615명이 전투 불능 상태였다.

핏빛 격전지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하가루에서, 미군 공병들은 탐조등 불빛 아래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땅을 불도저로 깎아 활주로를 건설했다. 이곳에 착륙한 다코타 수송기들은 4,500명이 넘는 부상자들을 흥남으로 후송했다.

18km를 38시간에 걸은 후퇴 행렬

그 직후 며칠간, 병력과 차량으로 구성된 후퇴 종대는 어떤 기회든 놓치지 않고 습격해 오는 중공군의 방해에 시달렸다. 한 종대는 불과 18km를 이동하는 데 무려 38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다.

흥남·원산 철수 작전의 마무리

흥남과 동해안 남쪽 80km 지점의 원산 항을 통한 해상 철수는 12월 24일에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105,000명의 병력과 98,000명의 피난민, 17,500대의 차량, 그리고 35만 톤의 탄약과 식량이 부산으로 남하했다. 이와 별개로 3,600명의 병력, 200대의 차량, 1,300톤의 화물을 옮기는 공중 수송도 함께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