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튀니지에서 벌어진 이 전역은 세 연합국이 서유럽에서 치르게 될 전쟁을 위해 훌륭한 전술적 준비이자 사기를 다지는 무대가 되었다.
동맹군에게 남긴 소중한 교훈
젊은 미군에게 튀니지는 없어서는 안 될 시험장이었다. 패튼(Patton) 장군과 같은 지휘관의 지휘 아래 미군은 이 전역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고, 유럽 전장에서 그 성과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튀니지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쌓은 이 경험은, 만약 거대한 유럽의 결전에서 직접 얻어야 했다면 훨씬 더 큰 희생을 요구했을 것이다.
영국 제1군 역시 필요한 단련 과정을 거쳤다. 2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베테랑이 된 선배 부대들에 비해 경험이 크게 뒤처져 있었지만, 이들은 빠르게 그 격차를 좁혀나갔다.
프랑스군의 재탄생
프랑스인 우리에게 이 전역은 진정한 재탄생을 의미했다. 1940년의 패배와 정전 협정이 남긴 굴욕이 드디어 씻겨진 순간이었다. 정전 협정으로 인해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은 한 번의 전투도 치러보지 못한 채 항복해야 했고, 이후 2년 넘게 적성국 감시위원회의 가혹한 통제 속에서 무장 해제와 자원 압수를 강요당해야 했다.
동시에 튀니지 전역은 프랑스군이 연합군의 존경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앤더슨(Anderson) 장군은 "내 지휘 아래 쾰츠(Koeltz) 장군과 프랑스 제19군단의 장교·병사들만큼 충성심 깊고 용맹한 병사들을 두어 본 적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영국 종군기자 존 다시-독슨(John d'Arcy-Dawson) 역시 자신의 튀니지 전역 저술에서 프랑스군을 "저 경이로운 전사들", "잃을 운명에 놓인 진지에조차 필사적으로 매달린 영원한 희생자들"이라 묘사하며, "보슈(Boche, 독일군)와 맞붙고 싶어 안달인 제19군단의 저 투지 넘치는 전우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낡고 부족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이 보여준 이러한 완강한 저항은 현대적인 미국식 장비로 재무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마침내 1940년의 적과 대등한 조건에서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으로
새롭게 갖춘 장비와 다져진 사기를 바탕으로, 아프리카군을 중심으로 하고 자유 프랑스 제1사단이 합류한 프랑스 원정군은 튀니지의 위대한 지휘관 주앙(Juin) 장군의 지휘 아래 연합군 승리의 선봉에 서서 로마를 향해 진격하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영예로운 무공을 세울 수 있었다.
전략적 성과 – 승리의 열쇠
튀니지 전역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과는 연합국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1918년의 승전국 진영을 재결집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후 전쟁의 귀추를 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전역의 핵심, 즉 물질적·전술적·도덕적 여러 호조건들이 온전한 효력을 발휘하게 만든 결정적 요소는 바로 전략적 결과였다.
튀니지의 승리는 추축국 세력을 아프리카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연합군에게 지중해 전역의 공해(空海)에 대한 절대적 제권을 안겨주었고, 북아프리카라는 발판을 확보해 주었다. 바로 이곳에서 처음에는 공군 편대가, 이윽고 연합군 육군이 남쪽으로부터 '요새 유럽(Fortress Europe)'을 향해 총공세를 개시하게 된다.
끝이 아니라 시작
따라서 튀니지의 승리는 끝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이었다. 세 갈래로 동시에 나아가는 출발선, 곧 먼저 이탈리아에서 개막되어 최후의 승리와 조국의 해방으로 이어질 장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