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라파예트' 비행대와 '튀니지' 폭격단 — 튀니지 전역의 연합군, 그 노력과 희생

 라파예트  비행대와  튀니지  폭격단 — 튀니지 전역의 연합군, 그 노력과 희생

세 동맹국의 노력과 희생

튀니지 전역의 승리는 프랑스, 미국, 영국 세 동맹국의 헌신적인 노력과 값비싼 희산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

먼저 프랑스는 영국군과 미국군의 집결과 전선 이동을 성공적으로 엄호한 뒤, 기계화 부대 중심이라 산악전에 취약했던 동맹군을 대신해 도르살(Dorsale) 능선 일대의 험준한 산악전에서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전쟁 경험이 부족했지만 선의와 용기로 가득 찬 젊은 미국 육군은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국군의 불굴의 인내

영국군은 다시 한번 그들이 자랑하는 강인한 인내심을 입증했다. 깔끔하게 다린 제복과 장갑을 착용한 채 희생을 각오하고 출격한 전차 승무원들의 열정, 근접 거리에서 독일 판처(Panzer) 전차를 격파한 포병들의 결연함, 그리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던 보병의 완강함까지 — 모두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평했듯, 영국 보병은 "세계 최고였지만, 그 수가 조금 부족했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부대였다.

값비싼 대가

이러한 노력에는 무거운 희생이 따랐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단연 영국군이었다. 앤더슨(Anderson) 군 하나만 해도 전사 4,400명, 부상 12,000명, 실종 4,500명에 달했다. 프랑스 아프리카군은 약 3,000명이 전사하고 8,000명이 부상당했으며 4,500명이 실종되었는데, 여기에 전역 후반부 르클레르(Leclerc) 기동부대와 제1자유프랑스사단(D.F.L.)이 입은 막대한 손실도 더해져야 한다. 미국군 역시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하늘에서 벌어진 전환점

지금까지 우리는 산악과 평원, 사막을 가로질러 펼쳐진 연합군의 지상 작전을 따라가며 공중 작전은 잠시 언급하는 데 그쳤지만, 이 공중전의 역할 역시 공정하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전역의, 아니 서부 전쟁 전체의 전환점은 지상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열렸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독일 공군(Luftwaffe)이 크게 유리했다. 튀니스와 비제르트(Bizerte)에 전장 바로 옆에 콘크리트 활주로를 갖춘 훌륭한 비행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콩스탕틴(Constantine) 일대의 열악한 지형은 비와 진흙으로 통행이 불가능해져, 연합군 항공기는 멀리 알제(Alger)의 비행장에서까지 이륙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1943년 초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튀니지 인근에 새로운 비행장이 개발되었고, 특히 4월에는 연합군이 튀니스 남쪽 해안 평야의 부지를 확보하면서 제공권의 주도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삼색 라운드의 귀환, '라파예트'와 '튀니지'

물론 이 공중전에서 프랑스 공군의 몫은 미미했다. 북아프리카의 소수 비행대들은 전역 초기 현대화된 장비로 재무장하고 훈련받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3년 1월부터 지상에서 싸우던 우리에게는 실로 큰 기쁨이 찾아왔다. 삼색 라운드(tricolor cockade)를 단 '라파예트(La Fayette)' 비행대가 피숑(Pichon) 상공에서 적기를 여러 대 격추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폭격 비행단 '튀니지(Tunisie)'는 이름의 유래가 된 이 땅에서 첫 출격을 시작으로, 훗날 동유럽과 서유럽 하늘에서 빛내게 될 화려한 전과의 서막을 올렸다.

왕립해군의 결정적 공헌,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아픔

마지막으로 왕립해군(Royal Navy)의 공헌에도 경의를 표해야 한다. 지중해와 시칠리아 해협에서 공군과 협력하여 추축국의 보급 통신망을 차단한 것이야말로 적의 패배와 항복을 이끈 결정적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랑스 해군은 소규모 부대를 제외하고는 이 노력에 참여하지 못했다. 레르미니에(Lherminier) 함장이 지휘하는 잠수함 '카사블랑카(Casabianca)'호 정도가 드문 예외였다. 고드프루아(Godfroy) 제독이 지휘하는 알렉산드리아 분함대는 튀니지 전역 내내 영국 항구에 머물며 중립을 유지하고 방관하는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