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엘 알라메인 전투의 배경: 열세에 놓인 추축국과 몽고메리의 결단

엘 알라메인 전투의 배경: 열세에 놓인 추축국

1942년 10월 23일 제8군의 공격을 마주한 추축국군은 모든 면에서 열세에 있었다. 가장 심각한 약점은 단연코 유명한 지휘관 로멜의 부재였다. 병을 앓고 있던 로멜은 9월 23일 독일로 돌아가 요양과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났고, 슈툼메 장군이 지휘를 이어받았다. 그는 적이 공격해 오면 로멜이 즉시 귀환할 것이라는 사실에 속으로 씁쓸함을 느꼈다.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로멜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로멜 자신도 물자가 풍부한 영국군을 상대로 하는 방어전을 "절망적인 전투"라고 여겼다. 로마와 베를린의 상층부가 여러 차례 약속을 했지만, 구체적인 원조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그는 자신의 병력, 전차와 포의 수, 연료와 탄약 비축량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면 마주 보고 있는 몽고메리는 끊임없이 전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는 예컨대 몽고메리가 자신 대비 2대 1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실제로는 이탈리아 전차 300대를 포함하면 5대 2, 독일 전차만 계산하면 11대 2에 달하는 열세였다.

영국 왕립공군(RAF)은 이미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였고, 이를 두고 경쟁하려는 루프트바페의 노력은 미미해 보였다.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로멜은 무솔리니에게 보급 상황이 조속히 개선되지 않으면 추축국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듀체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베를린에서는 히틀러의 맹목적인 낙관과 허튼 약속 앞에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카타라 저지대부터 바다까지: 요새화된 방어선

전선에서 로멜의 군대는 방어 준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타라 저지대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회랑에 야진 구축물을 촘촘히 늘어놓았다. 만약 이 요새 진지에서 철수하게 되면 차량과 연료 부족으로 서쪽으로의 후퇴가 어렵고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버티며, 적의 어떤 침투도 즉각적인 반격으로 격퇴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독일군이 설계한 방어 체계는 1918년에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초 진지의 스크린 뒤에 종심 깊게 편성된 방어 지역을 두어, 기동 예비대가 집결하고 반격할 수 있는 시간과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1918년의 교리를 한층 강화한 기술적 특징은 대전차·대인 지뢰의 대규모 운용이었다. 약 50만 개의 지뢰에 나포한 연합군의 폭탄과 포탄까지 더해져, 각 거점 주변과 전선 전체에 걸쳐 적의 침투를 막는 깊은 장애물 지대가 형성되었다.

각 방면에서 이탈리아 부대는 독일 부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갈수록 불안한 마음으로 충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방어 체계는 소모전을 권하는 초대장과 같았다. 문제는 영국군 사령부가 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였다.

처칠의 방문: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총리

"알람 할파 전투 전인 8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던 처칠이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버그엘 아랍의 우리 지휘소에서 몽고메리 장군은 총리와 일행이 편안히 머물도록 세심하게 배려했고, 바닷가에 있던 총리의 캐러번(트레일러)을 그대로 남겨두어 원하면 목욕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총리는 모스크바 방문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영국이 전쟁 승리를 위해 실질적으로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화를 내야만 했다고 말이죠. 그는 스탈린이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쟁 노력을 구석구석 칭찬하며 독일에 대비해 준비 중인 작전들을 이야기해 우리를 매료시켰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독일은 폭격을 원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전쟁을 시작한 날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영토가 폐허로 변할 테니까.'"

알람 할파 이후 로멜의 선택

알람 할파에서 패배한 후 로멜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였다. 첫째, 제자리에 머물며 몽고메리가 조만간 감행할 공격을 기다리는 동안 방어를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 둘째, 제8군이 추격할 여건이 되기 전에 더 유리한 진지로 후퇴해 보급선을 단축하고 보급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방안을 택했다. 차량과 연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퇴 명령을 내리는 것은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고, 히틀러에게도 매우 나쁘게 받아들여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선택은 연합군에게 하나의 결론을 가져왔다. 공격을 미룰수록 마주하게 될 방어 시설과 장애물, 즉 지뢰와 철조망 등은 더욱 형태스러워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공세에 나서야 했고, 이는 처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중동 총사령관 알렉산더 장군에게 9월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공격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추가적인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연합군이 상륙하는 작전 '횃불(Torch)'이 11월 초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몇 주 동안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면 그 작전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몽고메리의 결단: 9월이 아니라 10월에

어느 날 알렉산더가 지휘소에 처칠의 메시지를 들고 왔다. 9월에 공격하라는 꽤 강압적인 어조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읽은 몽고메리는 "프레디, 공책 좀 줘"라고 말한 뒤 이렇게 적었다.

  • 로멜의 공격으로 인해 우리의 준비가 다소 지연되었다.
  • 달의 위상 조건 때문에 개전일(D-데이)은 9월과 10월의 특정 시기로 제한된다.
  • 9월 공격을 강행한다면 부대는 여전히 장비와 훈련이 부족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10월에 공격하면 완전한 승리를 보장한다.

그리고 알렉산더에게 공책을 넘기며 말했다. "답신에 이 세 가지를 그대로 명시하겠습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분명해지니까요." 알렉산더는 이 메시지를 전달했고, 예상대로 결과가 나왔다. 총사령관이 이토록 명확한 충고를 했다면 총리가 어찌할 도리가 있었겠는가? 몽고메리는 회고록에서, 만약 9월 공격 명령이 내려진다면 전투를 지휘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알렉산더에게 '사적으로' 밝힌 바 있다고 적는다.

최종적으로 몽고메리는 10월 보름달에 맞춰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개전일은 23일로 정해졌다. 광활한 지뢰밭 때문에 작전은 반드시 야간에 개시해야 했다.

공격 계획: 정면 돌파와 기갑 예비대 섬멸

이제 계획 자체를 살펴보자. 적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발상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북쪽의 바다와 남쪽의 카타라 저지대가 그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면 돌파구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몽고메리는 주공을 우익, 즉 북쪽에 배치하기로 하고 리스(Leese) 장군의 제30군단에 맡겼다. 호록스(Horrocks) 장군의 제13군단은 남쪽에서 차공을 담당했다.

그다음 단계로 럼즈던(Lumsden) 장군의 제10군단이 제30군단이 열어준 돌파구를 통과해 적 후방을 위협함으로써, 로멜이 기갑 예비대를 투입하도록 강제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그 기갑 전력을 파괴할 수 있었다. 이는 완벽하게 정통적인 방식이었다. 기갑 예비대가 소멸하는 순간, 적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야전 사령관은 공세 준비를 위한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지휘, 장비, 훈련이었다. 지휘 체계는 빠르게 정비되었고 부대의 재장비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 수정: 갉아먹기 전술로의 전환

그러나 10월 초, 부대 훈련 수준이 요구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결함에 직면한 몽고메리는 즉시 공격 계획을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적 기갑 부대의 파괴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 대신, 진지를 방어하는 병력, 즉 기갑 차량이 거의 없는 부대를 점진적으로 갉아먹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갑 부대는 적 전차 부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저항 거점을 고정하고 측면을 엄호해 줄 보병 사단이 없다면, 적 기갑 부대는 필연적으로 열세에 놓이고 후방과 차단될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따라서 적 기갑 부대가 우리의 갉아먹기 전술 앞에서 수동적으로 머물 가능성은 낮았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맞이할 준비를 갖춘 상태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