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도르 작전과 런던의 우유부단
브룩포팜(Brooke-Popham)과 퍼시벌(Percival)을 무기의 열세만큼이나 괴롭힌 것은 송클라(Songkhla) 방면의 상황이었다. 적에게서 주도권을 되찾으려면 일본군이 먼저 도달하기 전에 이 공군·해군 기지를 선점해야 했고, 이를 위해 '마타도르(Matador)' 작전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9월 17일 런던의 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라며, 적이 태국을 침공하기 전에 태국 영토에 진입하는 것은 논외라고 회답했다. 영국 극동사령부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전시내각 특사 더프 쿠퍼(Duff Cooper)가 도착하면서 낙관론이 되살아났다. 9월 29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일본이 말라야가 아니라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계획하고 있으며, 어느 쪽이든 10월 북동 몬순이 불기 시작하면 동해안 상륙 시도는 없으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몇 주 뒤 도조(東條)가 코노에(近衛)를 대신해 내각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낙관론은 다소 식었지만, 런던은 여전히 안심시키는 견해를 내놓았다. 10월 26일 처칠은 독일이 러시아를 완전히 제압하기 전까지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단언했다. 문제는 연합군 정보기관들이 일본에서 '북진파'로 불리던 세력이 몇 주 전 '남진파'에게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준비 부족과 정글전에 대한 무지
이렇게 10월이, 그리고 11월이 흘러갔다. 말라야 주둔 영국군은 여전히 보병 사단 두 개, 기갑 연대 두 개, 그리고 대공포가 부족했다. 병력은 비행장 방어 임무에 분산 배치되었고, 제대로 된 훈련을 위한 시설도 기회도 없었다. 말라야에서는 여전히 상업적 이익이 우선했고, 고무 회사들은 자신들의 농원에 군대가 들어서는 것을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훈련 부족을 감안하더라도 병력의 질은 들쭉날쭉했으며, 병사와 장교 모두 정글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곧 값비싼 첫 번째 교훈을 받게 된다.
12월 6일, 일본 선단 발견
12월 6일 정오 직후, 코타바루(Kota Bharu)에서 출격한 '허드슨(Hudson)' 정찰기가 최초로 일본 수송선단을 목격했다. 12시간 뒤에는 강력한 해상 호위를 받는 22척 규모의 선단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확인되었다. 선단의 진행 방향으로 미루어 타이만(Gulf of Siam) 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곧 정찰 구역을 벗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후 남하하여 방콕에 상륙할지, 말라야에 상륙할지, 아니면 여러 곳을 동시에 기습할지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마타도르 작전 개시 허가는 거부되었고, 영국 지휘관들은 기다림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12월 6일 밤 내내 시야는 극도로 나빴다. 결국 7일 오후 5시 30분, 즉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30시간이 지난 후에야 순양함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 한 척이 송클라로 향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 시간 후에는 빠타니(Pattani) 북방에서 네 척의 배가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전쟁의 시작
여전히 '도발 금지'라는 집착에 얽매인 영국 지도부는 반격을 개시하지 못했고, 마타도르 작전은 새벽에 송클라 상공에서 정찰이 이루어진 뒤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자정을 조금 넘기자, 일본의 말라야 침공 의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의문은 잔혹하게 일소되었다. 코타바루 북동쪽에 주둔한 인도 제8보병여단을 지휘하던 케이(Key) 장군이, 해안에서 약 3.2km 떨어진 해상에 수송선 세 척이 정박했고 호위함들이 해안을 포격하고 있다고 긴급 보고한 것이다. 이윽고 일본군의 상륙이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뒤따랐다. 공군 참모부는 즉시 코타바루에 주둔 중인 영국왕립공군(RAF) 전투기와 어뢰기들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말라야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