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테이블을 사이에 둔 대결: 싱가포르 항복 협상의 생생한 기록

야마시타는 오후 2시에 그 소식을 접하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어떠한 기만에도 속지 않기 위해 영국군 총사령관이 직접 오도록 명령했다." 사절단이 돌아갔고, 오후 5시 15분 퍼시벌은 두 명의 참모 장교와 함께, 그리고 통역관인 와일드 소령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협상 테이블에서의 대치

두 사령관은 곧 부킷티마에 있는 포드 공장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일본 측 통역관 히시카리가 소개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 간결하게 답하십시오.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겠습니까?
— 일본군 포로가 있습니까?
— 없습니다.
— 일본인 민간인은요?
— 없습니다. 모두 인도로 보냈습니다.
— 좋습니다. 그럼 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십시오.

퍼시벌은 문서의 절반쯤 읽다가 물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야마시타는 화를 내며 답했다.

"지금 서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싸울 것입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입니까, 예스입니까 아니오입니까?"

퍼시벌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통역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야마시타는 그를 가로막으며 조급하게 손짓하고 외쳤다.

— 예스입니까, 아니오입니까?

퍼시벌은 통역관을 흘긋 바라본 뒤 답했다.

— 예스(예)입니다.
— 잘됐습니다. 우리는 일본 시각으로 오전 10시에 적대 행위를 중단하겠습니다.

민간인의 안전을 둘러싼 약속

그러자 퍼시벌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일본군이 시내에 진입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병사들과 민간인에게 항복 사실을 알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야마시타가 이를 승인하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 민간인과 영국·호주 병사들의 생명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합니까?
— 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나는 이를 절대적으로 보장합니다.

73일 전역의 끝

항복 문서는 오후 6시 10분에 서명되었고, 이로써 영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역 중 하나가 막을 내렸다. 전역은 73일간 이어졌다.

말레이와 싱가포르에서 영국·호주·인도군의 손실은 사상자 9,000명, 포로 13만 명에 달했다. 일본군의 손실은 전사 3,000명을 포함해 총 9,824명이었다.

두 사령관의 운명

퍼시벌은 일본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낸 뒤 살아남아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야마시타는 승리 직후 싱가포르에서 소환되었다. 도조의 적개심이 걱정되었지만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고, 전쟁 말기에는 필리핀 주둔 일본군을 지휘했다.

1946년 2월, 그는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처형은 같은 달 23일 집행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이렇게 남겼다.

"나는 전쟁 내내 나의 능력을 다해 의무를 다했다고 믿습니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를 변호해 준 미국 장교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너무 쉬운 승리가 남긴 그림자

오늘날 일본 군사 역사학자들은 말레이와 싱가포르의 너무나 쉬운 정복이 이후 1944년 버마 공세 당시 임팔과 코히마에서 드러난 무모한 성급함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본군은 영국이 다른 전구에서 결코 다시 일어나 맞서지 못할 것이라고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냉혹한 반대의 현실을 몸소 겪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