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힌골 전투 1939: 전쟁의 배경
할힌골 강 기슭에 펼쳐진 황량한 초원은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 제국의 팽창이 도달한 최전선이었다. 1937년 침공한 중국은 여전히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1931년 병합한 만주에 대한 제국의 통치는 흔들림이 없었다.
바로 이 몽골 인민 공화국의 광활한 야생의 땅에서 소련군의 실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35년 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차르의 군대에 참패를 안겨 주며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었다. 어쩌면 국경 분쟁을 빌미 삼아 횡단 시베리아 철도까지 깊숙이 진격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소련이라는 거인의 척추가 한 번 꺾이기만 한다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포함한 극동 러시아의 풍부한 자원은 천황의 군대 손에 넘어갈 것이었다.
북진론과 남진론, 갈라진 일본 군부
일본 최고 군부는 언제나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북진론으로, 러시아를 타격하자는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남진론으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광활한 군도 지역을 향해 진출하자는 입장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남진을 선택했고, 이 결정은 훗날 진주만, 싱가포르, 그리고 히로시마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육군의 많은 장교들은 러시아에 대한 불같은 공격 열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사령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산 호 사건과 대숙청의 그늘
1938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하산 호(한카 호)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국경 충돌, 이른바 장고봉 사건은 스탈린의 끔찍한 대숙청 이후 붉은 군대가 안고 있던 실질적인 결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시 리우시코프라는 장성급 장교가 소련을 탈출해 망명하면서, 러시아군의 배치 상황과 군 내부의 불만 사항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관동군에 넘겨주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눈을 피해, 그리고 이후에는 하달된 명령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형태로 관동군 사령부는 러시아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 기갑부대와 공군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승리가 그들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히로히토는 지시를 무시한 육군에 대한 공군의 지원을 금지했고, 사태는 결국 원상 복구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천황이라고 해서 장교들에게 공개적으로 체면을 깎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제국 체제가 늘 신경 쓰던 사안이었다. 하산 호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마자, 히로히토는 서쪽으로 더 먼 몽골에서 다음 해 여름 대결을 계획하던 육군 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을 재빨리 승인해 주었다.
노몬한, 운명의 국경 지대
일본 참모본부가 선택한 국경 지역은 할하강(할힌골)을 따라 이어졌다. 이 강의 유로는 거의 전 구간에 걸쳐 동쪽의 점령지 만주, 즉 만주국과 서쪽의 몽골 인민 공화국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했다. 몽골 인민 공화국은 1936년 3월 체결된 '상호 원조' 조약에 따라 소련의 보호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데 강 동쪽 한 지점에서 국경선은 노몬한 마을과 언덕 주변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폭 75km에 달하는 이 전략적 요충지에서 일본은 소련이 자신들의 조약상 의무를 과연 어디까지 준수할 것인지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 지역은 여름철이면 전형적인 초원의 풍경을 자랑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초록색, 곧 풀의 색이다. 강 동쪽으로는 지형이 더욱 험준해져 골짜기와 사구, 심지어 유사(流沙) 지대까지 존재한다. 인구는 유목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부족들이 드문드문 살아가는 수준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