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환호 속 꽃비에 실려 떠나다 –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의 마지막 행진

환호 속 꽃비에 실려 떠나다 –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의 마지막 행진

역경 속에서도 커져간 국제여단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국제여단의 조직은 꾸준히 발전해 나갔습니다. 1937년 11월에는 대부분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제13여단이 새롭게 창설되었습니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나프탈리 보트윈(Naftali Botwin)'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중대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고유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디시어로 신문도 발행했습니다. 이 부대를 이끌던 카를 구트만(Karl Gutmann)은 훗날 전투 중 목숨을 잃고 맙니다.

1938년 2월에는 절반이 슬라브계, 절반이 스페인 사람으로 이루어진 제129국제여단이 등장했습니다. 이 부대의 지휘관 코마르(Komar)는 훗날 폴란드군 장군으로 복무하게 됩니다.

1938년 봄에는 대대적인 재편이 단행되었습니다. 지휘부의 임무 수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원병들이 국적별로 재편성되었고, 그 병력을 바탕으로 대부분 외국인으로 구성된 두 개 사단—제35사단과 제45사단—이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격전의 현장들: 브루네테에서 아라곤까지

1937년 1월, 제14여단은 북부 전선의 압박을 덜어내기 위한 작전에 세고비아 인근에 투입되었습니다. 같은 해 6월에는 제12여단과 제149여단이 아라곤 지방에서 공세에 나섰지만, 제45사단을 지휘하던 루카츠(Lukacz) 장군이 전사하는 등 두 차례의 공세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같은 해 7월, 스페인 측 지휘관인 모데스토(Modesto)와 후라도(Jurado) 장군의 통솔 아래 모든 국제여단이 참전하여 마드리드 서쪽 카스티야의 브루네테(Brunete)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8월에는 벨치테(Belchite)에서 유사한 공세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0월 말 프랑코 진영이 아스투리아스에 진입하면서 전세는 점차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 국제여단은 테루엘 대전투의 최전선에 섰고, 이어 3월과 4월에는 아라곤 전투에서도 혈전을 벌였습니다. 두 전투 모두 초기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병력에서—그리고 무엇보다 장비와 물자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공화파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승리: 에브로 강 도하 작전

'국제부대'들의 마지막 전투는 승리로 장식되었습니다. 60km에 달하는 광범위한 전선에서 에브로 강을 건너, 간데사(Gandesa) 방면으로 20km를 전진한 것입니다. 이는 국제여단이 남긴 가장 인상적인 군사적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특히 프랑스 출신 의용병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인 앙리 롤(Henri Rol)은 훗날 롤-탕기(Rol-Tanguy) 대령이 되어, 1944년 8월 르클레르(Leclerc) 장군과 함께 파리에서 독일군 사령관 폰 홀티츠(von Choltitz) 장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영예를 안습니다. 또 다른 인물인 금속공 노동자 앙리 조르주(Henri Georges)는 훗날 파비앙(Fabien) 대령이라 불리며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지만, 1945년 알자스 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작별의 바르셀로나, 꽃비 속 떠나다

그러나 후안 네그린(Dr Juan Negrín) 박사가 이끄는 스페인 공화정부는 더 이상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타협에 기반한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국제연맹(S.D.N.)에서는 양 진영에 속한 외국인 병력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키는 방안이 논의되었고, 선의의 증표로 네그린 정부는 국제여단의 철수를 결정합니다.

1938년 10월 28일, 바르셀로나. 오랜 세월 스페인 땅에서 싸워온 '국제부대' 병사들이 마침내 스페인을 떠났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군중들의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고, 그들의 어깨 위로는 수많은 꽃잎이 흩날렸습니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에 헌신한 국제 의용병들에게 보내진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