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줄거리, 그러나 진짜 있었던 사건
전쟁 장르의 고전 영화로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아니어서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헬 투 에터니티(Hell to Eternity)(1960)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한 명의 군인이 단독으로 천 명이 넘는 일본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지나치게 과장된 미국식 영웅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히스패닉계 해병 가이 가발돈(Guy Gabaldon)이 사이판 섬에서 실제로 벌인 놀라운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그를 연기한 배우는 제프리 헌터(Jeffrey Hunter)입니다. 황야의 무법자(The Searchers)에서 존 웨인의 조연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왕중왕(King of Kings)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으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당시 헌터의 외모는 본인과 상당히 닮았다고 전해집니다. 감독 필 칼슨(Phil Karlson)은 대작 감독으로 이름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평생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전쟁 중 '5열 방지'라는 명목 아래 강제 수용소에 갇혔던 니세이(nisei), 즉 일본계 미국 시민들의 처참한 이야기였습니다.

니세이 가정에서 자란 멕시코 이주민의 아들
칼슨의 의도는 절반밖에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제작사가 주인공의 군복무 시기에 초점을 맞추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니세이의 문제는 영화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가발돈은 1926년, 다민족 도시였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니세이들과 더불어 상당수의 히스패닉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멕시코 이주민으로, 오늘날에는 사라진 직업인 구두닦이로 생계를 이어가며 여섯 명의 자녀까지 먹여 살아야 하는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발돈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사춘기 이전, 부모가 짧은 기간 안에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나카노(Nakano) 가족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나카노 가문은 니세이였습니다. 아들 쓰토모(Tsutomo)는 가이보다 한 살 위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모 갱(Moe Gang)'이라 불리던 길거리 무리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쓰토모는 훗날 레인 나카노(Lane Nakano)라는 예명으로 배우가 되었고, 친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카노 가문 덕분에 가이는 일본의 문화와 생활 방식은 물론 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이 지식이 얼마나 소중해질지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진주만 공습과 니세이 강제 수용
전쟁은 1939년 9월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국민 선전포고에 따라서야 공식적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후, 육군부는 국내에 거주하던 약 12만 명의 니세이에 대한 강제 수용을 명령했고, 이들은 주로 서부 해안 일대에 흩어져 있던 수십 개의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불과 두 주 만에 완료된 이 조치는 노골적인 인종적 보복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같은 대우를 받지 않았으니까요.
나카노 가족 역시 약 1만 1천 명의 니세이와 함께 와이오밍주의 하트 마운틴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가이 가발돈은 알래스카의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그는 1943년 3월, 입대 가능한 나이가 되자 해병대에 지원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새로 건설된 캠프 펜들턴 기지에서 훈련을 받았고, 니세이와 함께 산 경험을 높이 평가받아 해병대 일본어 학교로 파견되었습니다. 이후 정찰 및 관측 요원으로 제2해병사단 산하 제2연대 본부중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전황의 전환과 사이판의 전략적 가치
그 무렵 전쟁의 흐름은 이미 바뀌어 있었습니다.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보르네오, 버마, 네덜란드령 동인도, 홍콩, 중국 일부까지 집어삼키던 일본의 태평양 확장은 1942년 봄~여름의 두 차례 결정적 해전,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저지당했습니다. 이후 일본은 서서히 기울었고, 미국은 반격에 나섰습니다.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즉각적인 침공 대신 치열한 폭격을 통한 예비 작전을 선택했습니다. 적의 방어선과 불굴의 전투 의지를 모두 무너뜨리기 위해 근교에 섬 비행장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괌 다음으로 큰 마리아나 제도의 섬, 사이판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훗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되는 신형 중폭격기 B-29 슈퍼포트리스가 배치될 예정이었습니다. 사이판 함락이 쉽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습니다. 일본은 이 섬을 최후의 방어선 일부로 간주하여 수십 문의 연안 포대와 지하 요새, 그리고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주둔시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44년 6월 15일 해안에 상륙한 해병대와 육군 부대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전투는 3주간 계속되었습니다. 미군은 2,462명의 전사자와 10,364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일본군 사령부가 '전사자 한 명당 적 일곱 명을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사이판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탄생
그럼에도 일본군의 피해 규모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항복하지 않는 관례대로 사실상 모든 방어군이 전사했고, 여기에 2만 명의 민간인까지 더해졌습니다. 포로로 살아남은 병사는 겨우 931명이었는데, 그 학살 현장에 충격을 받은 가이 가발돈은 이 숫자에 지대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사이판을 담당한 것은 제2해병사단과 제4해병사단이었고, 가발돈 역시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조금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상륙 첫날 밤 그는 홀로 적진을 탐험하기로 결심하고 두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 출발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상관들은 무단으로 전선을 이탈하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팀으로 움직이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세 번째 출격에서 그가 일본군 50명을 두 손 들게 하고 나타나자, 더 이상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해병대는 드디어 추가 인명 손실 없이 적을 무장 해제시키는, 인도적이고 피 없는 새로운 무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가발돈은 일본어 실력을 활용해 적진에 다가가 선량한 대우를 약속하며 항복을 설득했습니다. 나아가 포로 한 명을 풀어주어, 품위 있는 조건의 항복 제안을 장교에게 전달하게 했습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장교가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 거래를 수락하고, 수백 명의 야위고 지친 병사와 민간인을 이끌고 한 줄로 행진해 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장면 덕분에 그는 '사이판의 피리 부는 사나이(Pied Piper of Saipan)'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섬의 상실은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치명타였습니다. 그는 내각 전체와 함께 사임했고, 고령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장군이 뒤를 이었습니다. 미군이 이제 일본 본토에서 불과 2,100km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행기지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본 열도는 미군 전투기의 공습권 안에 들어왔습니다.

티니안 전투, 부상, 그리고 훈장 이야기
이후 가발돈은 6km 남쪽의 인근 섬 티니안으로 옮겨갔습니다. 7월 24일부터 8월 1일까지 벌어진 또 하나의 전투였습니다. 사이판을 비롯한 다른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어군은 낮에는 숨고 밤에 싸우며 물자와 화력의 열세를 만회하려 했습니다. 가발돈은 그곳에서도 특유의 방식으로 포로를 계속 잡았습니다. 물론 대다수 일본군은 종전 때까지 버텼고, 마지막 저항자는 무려 1953년까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이판에도 산발적인 저항 세력이 남아 있었는데, 설득차 섬에 돌아왔다가 그중 한 명에게 기관총 일제 사격을 받은 것이 바로 가발돈이었습니다. 중상을 입은 그는 후송되어 이후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명예 제대했고, 지휘관은 그를 미군 최고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훈장은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발돈보다 10분의 1에 불과한 포로를 잡고도 명예훈장을 받은 전설적인 알빈 요크(Avin York) 상사와 비교하면 아이러니한 결과였습니다.
정보기관의 후속 조사에 따르면 이 해병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을 포함해 약 1,500명에 달하는 적을 포획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경이적인 숫자입니다. 그래도 가발돈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적에 대한 영웅적 용맹에 수여되는 은성훈장(Silver Star)을 받았고, 1960년 인기 TV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그의 이야기가 공개된 뒤에는 상위 훈장인 네이비 크로스(Navy Cross)로 격상되었습니다.
그 갑작스러운 인기가 앞서 소개한 영화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촬영된 이 작품에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데이비드 잰슨(David Janssen)과 앞서 언급한 제프리 헌터가 캐스팅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가이가 1964년 공화당 소속으로 연방 하원 의원에 출마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선에는 실패했습니다.
말년의 삶과 마지막 청원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덧붙이자면, 그의 두 번째 아내 역시 니세이였습니다. 여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던 그 부부는 약 20년간 사이판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가발돈은 2006년 플로리다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가 별세하기 한 달 전, 로스앤젤레스 시의회는 백악관에 네이비 크로스를 명예훈장으로 교체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사이판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남긴 위업은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