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968년 5월 항쟁: 도덕의 해방과 세대 돌파의 시작

"달려라, 동지여, 낡은 세계는 너희 뒤에 있다."

반란, 혹은 도덕의 해방

1968년 5월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후 생활 방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의견 없는 '꼬마' 취급을 받으며 어른들의 무시와 냉담함, 심지어 경멸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사실상 '청소년'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68년 이전에는 사람들이 아동의 지위에서 곧장 성인의 지위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1968년 5월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보다도 도덕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통용되던 모든 관습이 도전받았습니다. 여학생의 미니스커트와 바지 착용 금지, 피임약과 낙태 금지, 영화 검열, 남녀공학 제한, 교회의 위상 등이 모두 문제 삺혔습니다. 목표는 정신세계를 흔드는 것이었고, 훗날 히피 운동이 보여주듯 외모를 꾸미지 않는 대신 진정한 영혼의 질을 추구하는 태도로 이어졌습니다. 페미니즘 역시 5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해에 일어난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단연 성적 자유였습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소르본느에 앞선 미국의 불씨

항쟁의 기운은 이미 196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그 초점은 인종 차별에 맞서는 투쟁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쿠클럭스클랜(KKK)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마틴 루터 킹의 정신을 이어받은 흑인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았던 나라에서 시민권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열악한 동네에만 갇혀 살아야 했던 현실, 자신을 낯선 이로 만드는 감각에 맞섰습니다. 여성들은 흑인의 아름다움을 주창했습니다. 투쟁은 평화적으로 유지되었지만, 탄압은 더욱 잔혹해졌습니다.

동시에 베트남 전쟁은 언론을 통해 폭넓히 알려졌고, 미국 거리의 시위대는 참상의 장면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제 학살을 멈춰야 할 때"라고 외친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밥 딜런과 조안 배즈처럼 음악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1968년 5월은 학생 운동이었습니다. 지식인의 자녀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회 하층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층에 가까운 이들이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실제로 미국, 독일, 브라질, 일본,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를 잇는 시위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사실 5월 항쟁은 거의 10년간 이어진 저항 운동의 정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월 22일, 낭테르 대학의 학생들이 위기를 촉발했습니다. 5월 2일에는 파리 대학(소르본느)이 문을 닫았고, 다음 날 수백 명의 낭테르와 파리 학생들이 소르본느 안뜰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이 개입했지만 학생들은 연대로 맞섰습니다. 소르본느가 곧 폐쇄되자 시위는 계속됐고, 점점 격렬해졌습니다. 이제는 학생과 치안 부대 간의 실질적인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5월 10일 '바리케이드의 밤'이 찾아왔고, 사흘 뒤에는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자들도 움직이며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비판받았고 공산주의는 이상화되었습니다. 시위는 5월 내내 이어졌고, 드골 대통령이 5월 30일 재등장하면서야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사랑을 만들고, 전쟁은 하지 마라."

베이비부머 세대의 힘

더 이상 아이는 아니지만 아직 어른도 아닌 젊은이들은 압도적인 숫자를 무기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였고, 부모를 돕는 용돈도 받으면서, 조용히 따르고 어른의 뒤를 따르라는 관습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젊으니 입 닥쳐라(Be young and shut up)"라는 구호는 도발처럼 들렸지만, 실제로 젊은이들의 말이 귀 기울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상했던 효과가 나타난 것은 대규모 집단이 만든 압력 덕분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결의가 약하지 않았고,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예배당의 그늘 아래서 어떻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부모 세대: 따르지 말아야 할 본보기

1968년 스무 살의 젊은이들은 전쟁을 겪은 세대의 자녀였습니다. 어떤 부모는 전쟁을 '겨우 견뎌냈다'고 말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 참화를 일으켰거나 적어도 6년 만에 수백만 명의 죽음을 낳은 비극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 즉 어른들은 "입 닥치고 너희 같은 건 의견이 없다"며 훈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20여 년 전 수백만 명의 죽음을 낳은 이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멋진 양복을 입고 결점 없는 사람 행세하며 젊은이에게 설교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게다가 1968년에도 탈식민지 전쟁은 프랑스의 평화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의 반란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부모처럼 옷을 입는다는 것은 부모를 닮는 것이요, 그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리에는 꽃을 든 긴 머리의 남성 히피가 나타났고, 반대로 여성들은 치마를 벗고 바지로 갈아입으며 기존의 획일적 규범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1968년 5월은 권위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 운동이었습니다. 부모의 권위를 향한 동시에, 대학과 교육 전반의 권위를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상호작용과 유연성을 요구했습니다. 교사 신성화의 시대가 끝나고 학생들이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세대 단절이었습니다. 세기를 채운 전쟁의 책임이 있는 부모 세대와, 코드를 흔들고 틀을 깨는 청년 세대 사이의 단절이었습니다. 교육의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정체성을 찾으려는 열망, 이전 세대에 짓눌린 자유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학생들은 분노를 내보였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벌기 위해 살면서 그것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영광의 30년이라는 든든한 배경

젊은이들은 유리한 숫자뿐 아니라 시대의 조건도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전쟁과 수백만 명의 죽음 뒤에 도착한 그들에게 실업은 사실상 사라진 개념이었습니다.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은 공급이 수요를 압도해 고용 제한이 없던 30년이었습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새 직장을 걱정할 필요 없이 쉽게 일을 그만두고도 다음 날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1968년 5월의 봉기자들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심각하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 속에 행동했습니다. 교육 전반을 상대로 그토록 대규모 운동이 일어나려면 후방이 안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영광의 30년이 곧 근대성의 상징이었던 만큼 정신세계의 변화도 필요한 때였습니다. 성 역할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부터 남녀 공학이 허용되었습니다. 1968년 5월은 또한 드골리즘을 거부하는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기도 했습니다. 초기 시위에서 학생들은 지적·사회적 구분 없이 하나로 뭉쳤고, 이후 노동자들이 합류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거나 현명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자유의 바람

전쟁 세대가 영광의 30년이 가져다준 근대성을 좇았다면, 젊은이들은 자유, 여행, 평화, 정의를 꿈꿨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상을 위해 그들은 기존의 관습에 맞서 일어섰습니다. 학생들은 부모가 소비사회에 굴복하며 노동 계급을 착취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동유럽 국가들의 자유 박탈에 분노했습니다.

1968년 5월이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진화를 눈에 띄게 앞당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자유의 뿌리가 바로 그해 5월의 바리케이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