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5년, 파리는 노르만인(바이킹)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무려 11개월에 걸친 처절한 포위전을 견뎌야 했다. 수백 척의 배를 이끈 바이킹 함대가 센 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가 직접적인 위협에 놓인 것이다.
영웅적인 도시 방어
파리 시민들은 쉽게 무릎 꿇지 않았다. 파리 백작 외드(Eudes)와 주교 고즐랭(Gozlin)의 지휘 아래 도시는 끝까지 저항했다. 외드는 '강자'라 불린 로베르(Robert the Strong)의 아들이며 프랑스 공작 겸 앙주 백작이었고, 고즐랭 주교는 성직자의 신분을 넘어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직접 이끄는 방어의 상징이 되었다.
포위선을 뚫은 구원 요청
전황이 장기화되고 수비군이 지쳐가자, 외드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적의 포위선을 돌파해 황제 카를 3세(Charles the Fat)에게 합류하여 증원군을 요청한 뒤, 다시 성벽 안으로 돌아와 방어를 이어갔다.
싸우기를 거부한 황제
얼마 후 카를 3세는 4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제는 정작 검을 뽑지 않았다. 그는 피 흘리는 전투 대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바이킹의 철수를 협상하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 부르고뉴 지방은 바이킹의 약탈에 그대로 내맡겨졌다.
폐위된 황제, 왕이 된 백작
이러한 비겁함에 분노한 귀족들과 주교들은 마침내 카를 3세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새 왕으로 선택한 인물은 다름 아닌 파리를 지켜낸 영웅 외드였다. 한때 파리 백작에 불과했던 그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서프랑크 왕국의 왕관을 쓰게 된다.
885~886년의 파리 포위전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을 넘어,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가 흔들리고 새로운 지도자가 떠오르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