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영국의 성공과 브레티니 조약(1338~1360): 백년전쟁 초반 프랑스의 위기

불리한 조건 속의 잉글랜드,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프랑스는 인구 1,500만 명으로 잉글랜드 본토(약 400만 명)보다 훨씬 많고 부유하여, 잉글랜드를 손쉽게 압도할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경제 구조나 문화적 발전 면에서 잉글랜드는 일정한 뒤처짐을 보였다. 그러나 행정·통치 체제에 있어서만큼은 유럽 최고 수준의 선진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심각한 경제·재정 위기에 빠진 적수를 상대로 이러한 강점은 전쟁 초기 단계에서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교묘한 외교 공세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북부에서 벌인 초기 기동작전(승마 약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이를 충분히 보상할 외교적 성공들이 이어졌다.

플란데런은 잉글랜드산 양모 없이는 모직 공업을 유지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경제적 연고를 교묘히 활용해 저지대 국가들을 프랑스 세력권에서 분리시켰다. 플랑드른 모직공업에 필수적인 잉글랜드산 양모 수출을 금지하자, 부유한 플랑드른 도시들이 자크 판 아르테벨더(Jacques van Artevelde)의 지도 아래 봉기했다. 도시들은 필리프 6세에게 충성하던 백작 루이 드 네베르(Louis de Nevers)에 맞섰고, 1339년 잉글랜드와 조약을 맺어 군사적으로 원조하고 그를 '프랑스의 진정한 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또한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로베르 다르투아(Robert d'Artois)를 지원했고, 잉글랜드의 무역상 특혜 일부를 양보하는 대가로 에노(Hainaut)와 브라반트(Brabant)를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으며, 독일 내에서 수많은 동맹을 체결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1337년 여름 신성로마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었고, 황제는 이듬해 그를 라인강 좌안 지역의 제국 대리(vicarius)로 임명했다는 점이다.

양면 위기에 몰린 프랑스 왕정

이러한 연합 구도 속에서 프랑스 왕정은 동시에 두 방향에서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에드워드 3세는 1340년 1월 헨트(Ghent)에서 스스로 프랑스 국왕의 칭호를 공식 선포했으며, 백합 문장(fleur-de-lys)을 대인장과 자신의 문장에 새겨 넣었다.

연이은 군사적 참패: 슬루스에서 칼레까지

5개월 뒤인 1340년 6월 24일, 프랑스 함대는 브뤼헤 외항 근처 슬루스(Sluys) 해전에서 궤멸적으로 패배했다. 이 재앙으로 프랑스는 해상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전선은 곧 브르타뉴 상속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지원하는 장 드 몽포르(Jean de Montfort)와 필리프 6세가 후원하는 샤를 드 블루아(Charles de Blois)가 후계 자리를 놓고 대립한 것이다. 이 분쟁은 1343년 1월 휴전으로 일단락되었고, 에드워드 3세는 다른 계획을 추진할 여유를 얻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새로운 잉글랜드군은 대규모 기동작전의 서막을 열었다. 한 달간 350km를 넘는 거리를 행군한 끝에, 1346년 8월 26일 크레시(Crécy)에서 프랑스군과 충돌했다. 프랑스군의 패배는 또다시 철저한 것이었다. 진격을 계속한 에드워드 3세는 마침내 칼레 성벽 아래에 도달했다. 11개월간의 공성전(1346년 9월~1347년 8월) 끝에 도시는 항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명한 '칼레의 시민 6인'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잉글랜드령이 된 칼레는 이후 브뤼헤를 대신해 잉글랜드 상인들의 최대 거점이 되었다.

연이은 패배 속에서 필리프 6세의 지위와 권위는 피할 수 없이 추락했고, 프랑스 왕정은 국왕 주변에서 벌어진 일종의 궁정 혁명으로 상징되는 심각한 내부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크레시도 칼레도 프랑코-잉글랜드 분쟁을 종결 짓지는 못했다. 1347년 9월 28일 휴전이 체결되었고, 이 휴전은 분쟁 외부의 변수 덕분에 1355년 6월까지 연장되었다. 바로 1347년 아시아에서 건너와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휩쓴 검은사망(흑사병)이었다.

필리프 6세 사후: 새로운 변수들

1350년 필리프 6세가 서거했을 때,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일한 호재는 크레시에서 포로로 잡혔던 새 플란드런 백작 루이 드 말(Louis de Male)이 탈출에 성공해 1349년 플랑드른 도시들의 복속을 이뤄낸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 반전으로 에드워드 3세는 소중한 지원 세력을 잃었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반면 새로 즉위한 프랑스 국왕 장 2세(장 르 봉, Jean le Bon) 통치 초기에 에드워드 3세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동맹을 얻었다. 나바라 국왕 '악인(le Mauvais)' 샤를 2세였다. 그는 앙구엘렘 백작령을 왕실에 내주고도 영토 보상을 받지 못한 데 분노해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보몽르로제 백작령과 코탕탱 반도 대부분을 받고서야 항복했지만, 이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25년간 음모와 술책의 시대가 이어졌다. 같은 시기, 새로운 프랑코-잉글랜드 협상의 결렬은 장 르 봉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푸아티에 참패와 프랑스의 내부 동요

1355~1356년 작전은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the Black Prince)가 이끌었다. 그는 1355년 랑그도크를 가로지르는 성공적인 기동작전에 이어,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Poitiers) 전투에서 장 르 봉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겼다. 프랑스 국왕은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참패 소식과 함께 왕권에 대한 반발이 곳곳에서 폭발했다. 당시 18세였던 왕태자 샤를(Dauphin Charles)은 조직적인 반대 세력과 맞서야 했다. 그 배후에는 나바라 국왕의 심복이 된 라옹 주교 로베르 르 코(Robert Le Coq),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 상인단장 에티엔 마르셀(Étienne Marcel)이 있었다. 마르셀의 구상은 당대의 표현을 빌려 '국가의 개혁'이었다. 즉 가장 부패한 관료들을 걷어내고, 삼부분(三部分) 대표들로 구성된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을 지니고 왕국과 국왕 모두를 통솔하는 평의회'를 통해 왕정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왕태자는 굴복하여 1357년 3월의 대칙령(Grand Ordinance)을 비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로 파리 시민 계급의 입장을 대변한 삼부회가 점점 더 과감한 요구를 내놓는 동안, 온건파인 지방 삼부회들은 세금 징수와 사용의 통제에 집중했을 뿐 큰 정치는 왕권에 맡기는 경향을 보였다. 이윽고 상황은 에티엔 마르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그는 수도의 지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위협도 등장했다. 특권층에 맞선 가난한 민중의 봉기, 이른바 자크(Jacques) 농민 반란이었으나, 이는 신속히 진압되었다. 에티엔 마르셀은 잉글랜드와의 내통이 드러나면서 모든 인기를 잃었고, 1358년 암살당했다. 왕태자는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고, 파리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왕정의 승리였다.

브레티니 조약: 잠정적 평화

질서가 회복되자 잉글랜드와의 협상이 재개될 수 있었고, 협상은 1360년 5월 1일 서명된 가혹한 브레티니 조약(Treaty of Brétigny)으로 귀결되었다.

  • 광대한 영토 할양: 에드워드 3세는 루아르강부터 중앙고원(마시프 상트랄)과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아키텐 지역을 완전한 주권으로 획득했다. 여기에 칼레와 그 주변 지역, 퐁티외, 귀네 백작령이 더해져, 프랑스 왕국 영토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 왕의 몸값: 포로가 된 장 르 봉의 몸값은 300만 크라운(금화)으로 책정되었다.
  • 에드워드 3세의 양보: 대신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 발루아 왕가가 지키는 왕국 영역 내에서 자군이 점령한 요새들을 반환하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서유럽에 지속적인 평화가 찾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임은 머지않아 드러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