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 프랑스의 총사령관, 브로셀리앙드의 검은 마스티프

초기 생애와 '브로셀리앙드의 검은 마스티프'

1320년, 디낭 인근 라 모트-브루옹에서 태어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브르타뉴의 가장 오래된 가문 중 하나 출신이다. 로베르 2세 뒤 게클랭(1300년경~1353년, 라 모트-브루옹 영주)과 잔 드 말레맹(1350년 사망, 상스 영주)의 장남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힘과 무술 솜씨, 호전적인 기질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추한 외모(‘렌에서 디낭까지 가장 못생긴 남자’라는 평이 있었다)와 거친 성정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 검으로써 귀족들의 존경을 얻어야만 했다.

15세 때 출전이 금지된 대회에 몰래 참가해 모든 상대를 제압한 뒤, 아버지를 상대로는 경의를 표하며 창을 비껴 든 일화는 그의 기개와 효심을 동시에 보여준다.

군사 경력의 시작: 렌 방어전과 브르타뉴 계승 전쟁

1357년,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가 포위한 렌 방어전에 참가하며 이름을 알렸다. 엘레아스트르 드 마레가 이프의 몽뮈랑 성에서 그를 기사로 서임하고, 퐁토르송과 몽생미셸의 대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샤를 드 블루아와 장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국 계승권을 놓고 다툰 전쟁에서 샤를 드 블루아 편에 서서 용맹을 떨쳤다.

코슈렐 전투 승리와 나바라 왕과의 대결

1360년 노르망디, 앙주, 메인의 부지사, 1364년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 지역의 총사령관 겸 프랑스 궁내관을 지냈다. 1364년 4월 샤를 5세의 즉위를 축하하며 코슈렐 전투에서 나바라 왕의 군대를 격파, 노르망디의 롱그빌 공작령을 하사받았다.

오레 전투에서의 포로 생활과 스페인 원정

샤를 드 블루아를 돕기 위해 다시 브르타뉴로 향했으나, 1364년 9월 오레 전투에서 패해 영국군 사령관 존 챈도스에게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왕이 10만 리브르의 몸값을 지불해 풀려났다.

1365년, 프랑스 왕의 요청으로 왕국을 괴롭히던 ‘대부대(Grandes Compagnies)’를 규합해 스페인으로 이끌었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에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를 지원, 페드로 1세(잔혹왕)의 세력을 거의 무너뜨렸으나, 챈도스와 흑태자가 구원군으로 오면서 1367년 나헤라 전투에서 패해 다시 포로가 되었다. 또다시 샤를 5세가 거액의 몸값을 치러 석방시켰고,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설욕하며 엔리케를 왕위에 복위시켰다. 이 공로로 몰리나 공작에 봉해졌다.

프랑스 총사령관 임명과 영국 축출 작전

1370년 10월, 귀국한 그는 샤를 5세로부터 총사령관(Connétable) 직을 수여받았다. 프랑스 기사단의 관례인 대규모 원정 대신, 성을 하나씩 포위하며 체계적으로 영지를 수복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노르망디, 기옌, 생통주, 푸아투에서 영국군을 몰아냈으며, 정공법뿐만 아니라 기습과 계략으로 단기간에 성을 함락시키곤 했다.

  • 1373년: 사촌 올리비에 드 모니(레네 영주, 프랑스 귀족원 의원)와 함께 브르타뉴 원정 참여
  • 1374년: 라 레올 전투 참전
  • 1376년: 노르망디 퐁토르송 영지 수여
  • 1378년: 샤를 5세가 장 4세로부터 브르타뉴를 몰수하자, 브르타뉴 병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탈영하고 뒤 게클랭 자신도 반역 혐의를 받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총사령관 검을 반납하고 스페인으로 떠날 뻔했으나, 왕의 사과로 복귀해 남부 전선에서 다시 영국과 싸웠다.

말년과 최후

1380년, 오베르뉴에서 대부대 잔당을 토벌하고 샤토뇌프-드-랑동 성을 포위했다. 수차례 격렬한 공성전 끝에 성주가 ‘15일 내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총사령관에게 항복하겠다’고 약속한 사이, 뙤약볕 아래 싸운 뒤 얼음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으로 7월 13일 숨을 거두었다. 휴전 기간이 끝나자 성주는 열쇠를 그의 관 위에 놓고 항복했다. 시신은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사후 처리와 안장

유언에 따라 브르타뉴로 이장하려 했으나, 무더위와 긴 여정 탓에 방부 처리가 시급했다. 왕실 방부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 내장과 뇌를 적출해 포도주와 향신료 혼합액에 담갔으나 효과가 없었다. 파리 떼가 행렬을 뒤따르자, 결국 시신을 대형 가마솥에 삶아 살을 뼈에서 분리해야 했다. 뼈와 심장만 브르타뉴로 향했으나, 샤를 5세가 예외적으로 ‘미천한 출신의 신하’를 왕들의 안식처인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하도록 명했다.

혁명기(1793년) 생드니의 묘와 르퓌(내장), 몽페랑(삶은 살)의 무덤이 훼손되었으나, 심장만은 디낭의 야고보회 수도원 바닥 아래 안치되어 1810년 디낭 생소뵈르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네 곳의 무덤 모두 현존하며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생드니의 기와상(누운 상)은 동시대 초상화와 신체 묘사대로 추악하면서도 투쟁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두었다.

가족 관계

혼인

  • 초취(1363년경, 비트레): 티펜 라그네넬(1373년 사망) - 로뱅 3세 라그네넬(샤텔오제 영주, ‘30인 결투’ 영웅)과 잔 드 디낭(라 벨리에르 자작부인)의 딸.
  • 재취(1374년 1월 21일, 렌): 잔 드 라발(1385년 이후 사망) - 장 드 라발(1398년 사망)과 이자보 드 탕트냐크의 딸. 뒤 게클랭 사후 1384년 기 12세 드 라발(1412년 사망, 라발 영주)과 재혼했다.

뒤 게클랭에게 적출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잔 드 라발이 재혼한 기 12세 드 라발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유럽 전역의 평민, 귀족, 군주 가문으로 퍼져나가 오늘날 수많은 후손을 두고 있다.

형제 및 사촌

  • 올리비에 뒤 게클랭(1403년 사망): 친동생. 형 사후 롱그빌 백작 작위 계승.
  • 올리비에 드 모니: 사촌. 노르망디 총사령관 겸 샤를 6세 궁내관.
  • 올리비에 뒤 게클랭(바우루제 영주): 또 다른 사촌. 샤를 드 블루아 지지파.

참고: 외스타슈 데샹,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죽음에 부치는 발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