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가스통 3세 드 푸아: '페뷔스'라 불린 피레네의 군주

1331년 오르테즈(Orthez)에서 태어나 1391년에 세상을 떠난 가스통 3세(Gaston III)는 가스통 2세의 아들이었다. 그의 별명 '페뷔스(Fébus)'는 '푸아(Foix)'와 아폴로 신의 별칭인 '포에부스(Phoebus)'를 엮은 다소 학자스러운 말장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줄타기

그의 가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가스통 3세 역시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왕권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외교를 펼쳤다. 다만 그의 경우 그것은 완숙한 기교에 가까운 술책이었다. 처음에는 필리프 6세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아르마냐크 백작에게 호의적인 장 2세에게서는 베아른(Béarn) 지역의 충성 서약을 거절했다.

로낙 전투와 화려한 궁정

그는 대병사단(Great Companies)이라 불린 용병 무리를 기반으로 삼아 아르마냐크의 장(Jean d'Armagnac)과 전쟁을 벌였고, 1362년 로낙(Launac) 전투에서 그를 격파해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터무니없이 큰 몸값, 무려 30만 플로린을 요구했고 실제로 받아냈다. 물론 푸아 백작과 아르마냐크 백작이 서로 맺은 '선의의 평화' 약속은 그 이전의 여러 차례와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막대한 몸값을 바탕으로 가스통 3세는 오르테즈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화려한 궁정을 열었으며, 이 모습은 연대기 작가 프로아사르(Froissart)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랑그독 총독 임명과 복귀

1377년부터 그는 샤를 5세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었고, 샤를 5세는 그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380년 그를 랑그독(Languedoc)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섭정 체제 아래 어린 샤를 6세가 즉위하면서 이 직책은 베리 공작(Duc de Berry)에게 넘어갔다. 그 결과 랑그독과 가스코뉴(Gascony) 국경 지대는 긴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공작의 형편없는 통치가 이어지자, 마침내 친정을 시작한 젊은 왕은 가스통에게 그의 영지를 돌려주었다. 1390년, 죽음을 앞둔 가스통은 자신의 모든 영토에 대한 보편적 상속자로 자신의 주군을 지정했다.

『페뷔스의 거울』 — 사냥에 대한 위대한 논저

사냥에 평생을 바친 애호가였던 그는 이 분야에 관한 학식 깊은 대작 『페뷔스의 거울(Le Miroir de Fébus)』을 집필했다. 이 책은 방대하고 다소 장황하기까지 한 중세 사냥 문헌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빛과 그림자: 걸출함과 폭군성 사이

용감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가스통 페뷔스는 단순히 현명한 영주였을 뿐 아니라, 적어도 생애 말기에는 프랑스의 통합이 피레네 지역에 가져올 이익을 내다본 원견의 정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명성과 그의 곁에 있던 이들에게 그는 신비주의적 참회를 행했음에도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고, 푸아 백작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극심한 탐욕의 소유자였다. 그의 성격에 내재된 폭력성은 광기의 경계에까지 다다랐다.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옅은 의심만으로 1382년 자신의 유일한 적자 가스통을 살의 없이도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

최후와 계승

가스통 페뷔스가 사망하자, 샤를 6세는 그의 권리를 카스텔본의 마티외(Mathieu de Castelbon)에게 양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