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오브 우드스톡(Edward of Woodstock), 통칭 검은 왕자(The Black Prince)(1330년 우드스톡 출생 ~ 1376년 웨스트민스터 사망)는 웨일스 공, 체스터 백작, 콘월 공작, 그리고 아키텐 공을 겸한 인물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헤인홀트의 필리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입니다.
'검은 왕자'라는 별명의 진짜 유래
흔히 이 별명이 검은 갑옷의 색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이 별명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검은 왕자'라는 호칭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무려 1568년, 리처드 크래프턴의 『잉글랜드 연대기』에서부터입니다.
생전에는 단순히 '왕자'라고 불렸으며, 웨일스 공으로 지내다가 1362년부터 1372년까지는 아키텐 공이라 불렸습니다. 또한 출생지를 따서 '우드스톡의 에드워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유년기와 기사 서임
1330년 6월 15일 옥스퍼드 근교의 우드스톡에서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공놀이, 도박, 매 사냥, 음유시인의 낭송 등 당시 귀족 계층의 전형적인 유희를 즐기며 자랐습니다. 그의 스승은 월터 버리와 헤인홀트 출신 기사 월터 모니였습니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프랑스에 맞서 동맹을 맺기 위해 플랑드르로 떠나자, 그는 '왕국 수호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를 몹시 아꼈고, 교육과 왕자로서의 소양 함양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1345년 7월 12일, 아버지의 손에 의해 기사로 서임되었습니다.
크레시 전투: 16세 소년의 처녀전
이미 여러 토너먼트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1346년 7월 11일 헤이그에 상륙하여 아버지와 함께 노르망디를 유린했고, 같은 해 크레시 전투에서 첫 대규모 전투를 경험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역시 젊은 워릭 백작의 도움을 받아 잉글랜드군 우익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당시 연대기에 따르면, 어린 왕자는 그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프랑스 기사에게 무기를 빼앗겼으나, 그의 군기 담당관이 침착하게 그를 웨일스 공의 붉은 용 깃발 아래에 숨기고 공격자들을 물리쳤다고 전해집니다. 해 질 녘에 그는 몸값을 낼 수 없는 부상당한 프랑스 병사들의 처형을 명령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늦게 도착한 프랑스 도시 민병대를 상대로 더 큰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기사도 정신이 지켜지지 않은 이 일로 왕자는 아버지 앞에서 큰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며, 바로 이 전투 이후 그가 검은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한편 체스터 백작령에서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한 뒤, 그는 가스코뉴의 대리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가스코뉴 원정: 백년전쟁 속의 파괴 행진
아버지의 명을 받아 1355년 9월 20일 보르도에 도착한 그는, 백년전쟁 한가운데서 프랑스로부터 영·가스코뉴 영토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두 주일 뒤 남서부를 관통하는 원정에 나선 그는 쥐약, 아르마냐크, 아스타라크 백작령을 유린하고 툴루즈 주변에서 대학살을 자행했으며, 몽지스카르에서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학살하고 카르카손과 나르본느를 약탈했습니다.
그는 정복한 땅을 잉글랜드 왕실에 복속시키기보다는 약탈과 재원 착취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1355년 10월 31일에는 카스텔노다리를 파괴했고, 성탄절에는 보르도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승전보를 알렸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와 프랑스 국왕 포획
1356년 봄, 전략가로서의 명성과 그가 불러일으키는 공포 덕분에 그는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가스코뉴인으로 구성된 이질적인 군대를 손쉽게 규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정은 푸아투 지방을 관통하며 진행되었는데, 부르주는 함락하지 못했고 비에르종은 함락한 뒤 수비대를 모두 베었습니다.
막대한 전리품 때문에 발걸음이 느려지고 전투에 지친 병력은 보르도로 후퇴했고, 추격해오던 프랑스군을 푸아티에 근교의 모프르투아에서 격파했습니다. 바로 1356년 9월 19일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그는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생포했고, 이는 잉글랜드에 유리한 협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아키텐 공 시대: 화려한 궁정과 무거운 세금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으로 에드워드 3세는 보르도와 바욘 사이에 걸쳐 있던 '전통적인' 아키텐 공국 외에 추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여기에는 케르시, 페리고르, 리무쟁, 루에르그, 비고르, 아르마냐크 백작령, 아제네, 생통주, 앙구무아, 푸아투가 포함됩니다. 프랑스가 완전한 주권으로 할양한 이 영토들은 1362년 자치 공국을 구성했고, 그는 1371년 초까지 현지에서 직접 통치했습니다. 1362년 7월 19일 아버지에 의해 아키텐 공으로 임명된 그는 1372년 10월 5일 사임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1362년 그는 사촌인 켄트 백작부인 조안과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보르도에서 궁정을 열었는데, 사치와 호화가 만연했고 잔치와 토너먼트가 자주 열렸습니다. 이를 재정하기 위해 그가 영지에 부과한 세금은 어마어마했고, 귀족과 백성들은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스페인 원정과 재정 위기
검은 왕자는 폐위된 카스티야 국왕 '잔혹왕' 페드로를 돕기 위해 스페인에 원정했고, 1367년 나헤라에서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다시 한번 격파했습니다. 이 원정 역시 군사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페드로가 원정 비용 지불을 거부하면서 왕자는 끔찍한 재정난에 빠졌습니다.
아키텐으로 돌아온 그는 앙굴렘에서 공국 삼신분회를 소집했고, 회의는 공의 재정 회복을 위해 각 가구에 부과하는 세금인 푸아주(fouage) 징수를 승인했습니다(1368년 1월). 그러나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Johan I)가 이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지원을 요청했고, 샤를 5세는 1368년 6월 30일 왕자에 대한 항소를 받아들여 브레티니-칼레 평화 조약을 무력화했습니다. 아르마냐크 백작은 친척인 알브레 영주 아르노-아마뉘를 함께 끌어들였고, 샤를 5세의 동생이자 랑그도크의 왕실 대리 총독인 앙주 공작 루이의 군사 공세를 지원했습니다.
아키텐 상실과 리모주 약탈 논란
브레티니-칼레 조약으로 할양된 아키텐 공국의 영토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항소 이후, 1369년부터 1372년 사이에 앙주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탈환되었습니다. 다만 '프랑스'를 향한 주민들의 일치단결된 봉기라는 통설은 오류가 있습니다. 미요나 몽토방 같은 도시들은 1369년에도 한동안 충성을 유지했고, 푸아투·생통주·앙구무아는 1372년에야 항복했으며 왕자를 강력히 지지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역사학계는 1370년 8월 24일의 리모주 약탈 책임을 왕자에게 돌려왔습니다.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당날 3,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하나, 현지 기록은 300명의 사망자만 언급하는데, 이는 그 도시에 주둔한 프랑스군 수비대와 프랑스 편에 선 일부 리모주 시민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군도 1374년 7월 22일 브리브를 함락할 때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리모주는 '시(Cité)'와 '샤토(Château)'라는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도 간과됩니다. 검은 왕자가 공격한 것은 그를 배신한 주교(요한 뒤 크로)가 다스리던 '시' 구역이었을 뿐, 1372년까지 충성을 지킨 '샤토' 구역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말년과 유산
그는 스페인 원정 중 이질에 걸린 것으로 보이며, 이 병으로 인해 프랑스와 그 지지자들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1371년 1월 그는 잉글랜드로 떠나며 아키텐을 동생 랭커스터 공작 장 드 강(John of Gaunt)에게 맡겼습니다. 이때 그는 1367년 보르도 대주교 궁(현재 보르도 시청 부근)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리처드를 데려갔습니다. 이 아들이 에드워드 3세 사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되는데, 출생지를 따서 '보르도의 리처드', 혹은 '가스콩'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당시 보르도는 서부 가스코뉴의 수도로 여겨짐). 그는 1377년부터 1399년까지 재위하다 사촌 랭커스터의 헨리에게 폐위되었고, 헨리는 헨리 4세(1399~1413)로 즉위했습니다.
함께 싸운 동료 장수들
그의 전우이자 고위 장교로는 다음 인물들이 꼽힙니다.
- 존 찬도스(†1370년 1월 2일, 푸아투 모르트메르): 에드워드 3세의 대리로 브레티니-칼레 조약 할양지 인수를 담당(1361~1362)했으며, 이후 아키텐 대장군(1363~1370)을 역임
- 토머스 펠틀턴: 아키텐 공국 총독(1363~1377)
- 요한 드 그레이리(장 드 그라이이): 가스코뉴 출신 부슈 캅탈(†1376년 9월 7일, 파리에서 프랑스 왕의 포로로 사망), 1370년부터 1372년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힐 때까지 아키텐 대장군 역임
- 기샤르 당글(†1380년, 런던): 아키텐의 두 원수 중 한 명(1363~1372), 훗날 왕세자 리처드 2세의 후견인이 되고 헌팅던 백작에 봉해짐(1377~1380)
- 기욤 7세 라르셰베크(파르트네 영주), 루이 다르쿠르(샤텔로 자작): 투아르 공방전 이후 1372년 12월 프랑스 국왕에게 항복을 강요당한 푸아투의 대영주들
왕자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가 서거하기 1년 전인 137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잉글랜드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으며, 지금도 그곳에서 그의 장엄하고 유명한 석관 조각상(횡와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