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 활동에서 템플 기사단은 정예 병력으로서 높은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용감한 전투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지혜로운 전략가임도 입증했습니다. 템플 기사단은 프랑크 왕국 군대가 참전한 거의 모든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1129년부터는 왕실 군대에 정식으로 합류해 함께 싸웠습니다.
아스칼론 제2차 공성전 (1153년 8월 16일)
다마스쿠스 공성전이 예루살렘 국왕 발두앵 3세에게 큰 실패로 돌아오자, 그는 대신 아스칼론 공략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성단장 베르나르 드 트라멜레는 왕의 의견을 지지했고, 1153년 8월 16일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템플 기사단에게 학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단장을 따라 불과 40명의 기사가 성 안으로 진입했지만, 이들은 도시를 지키던 이집트 수비군에게 모두 살해당했고 시신은 성벽에 내걸렸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일부는 템플 기사단이 전리품과 보물을 독차지하려고 홀로 성에 진입했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무공을 세워 성단의 명예를 드높이려 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결국 아스칼론은 1153년 8월 22일 함락되었고, 템플 기사단은 새로운 성단장으로 앙드레 드 몽바르를 선출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총애를 받던 기사 기욤 2세 드 샤날유의 선출을 막기 위해 이 자리를 수락했습니다. 기욤 2세는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영웅이며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레몽 드 생질)와 함께 싸운 기욤 1세의 아들로, 그가 성단장이 된다면 프랑스 왕이 성단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기사르 전투 (1177년 11월 25일)
1177년 11월 25일에 벌어진 이 전투는 당시 16세의 어린 예루살렘 국왕 발두앵 4세가 치른 초기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가자에서 강행군을 감행한 80명의 템플 기사들이 왕의 부대에 합류하며 전력이 크게 보강되었습니다.
이 연합군은 람라 근교 몽기사르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틴 전투 (1187년 7월 4일)
나병을 앓던 국왕 발두앵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여동생 시빌라의 남편인 기 드 루지냥이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템플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조언에 따라 기 드 루지냥은 군대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날씨가 극도로 건조했고 유일한 물 공급원이 티베리아스 인근 하틴에 있었기 때문에, 왕은 부대를 그 방향으로 진군시켰습니다.
1187년 7월 4일, 살라딘은 프랑크 군대를 포위했습니다. 약 1만 5천 명에 달하는 거의 모든 병력이 포로로 잡혔으며, 국왕 본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살라딘이 템플 기사단을 특히 미워한 탓에, 템플 기사들은 물론 구호 기사들까지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단 한 사람, 성단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르수프 전투 (1191년 9월 7일)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제3차 십자군이 유럽에서 출범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독일군 대부분이 황제의 강 익사 사고 이후 철수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필리프 오귀스트)가 귀국하면서 리처드 심장왕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리처드는 해안선을 따라 진군함으로써 함대와 끊임없이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병력 보급을 지속적으로 확보했습니다.
거대한 종대를 이룬 리처드 군의 선봉은 템플 기사단이 맡았고, 그 뒤를 브르타뉴와 앙주 부대, 동포 푸아투인들과 함께한 기 드 루지냥, 노르망디와 잉글랜드 부대가 차례로 따랐으며 후위는 구호 기사단이 담당했습니다.
전투 초반 리처드는 살라딘의 주도권에 밀렸지만 상황을 장악했고, 마침내 프랑크 기사들의 두 차례에 걸친 연속 돌격으로 살라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비록 첫 번째 돌격이 계획보다 이르게 시작되어 위기를 빚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만수라 전투 (1250년 2월 8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는 형인 성왕 루이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실군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간곡히 권하는 템플 기사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프랑크군 선봉은 만수라 시내에 진입해 골목골목으로 흩어졌고, 무슬림군은 이 빈틈을 파고들어 반격을 개시하며 프랑크군을 괴롭혔습니다. 결과는 참담한 재앙이었습니다. 템플 기사단은 성단장 기욤 드 소낙을 포함해 295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이는 4~5명에 불과했습니다. 무모하고 아무런 의미 없는 이 질서 없는 공격의 주동자였던 로베르 드 아르투아 역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왕 루이는 같은 저녁 반격을 감행해 선봉을 섬멸한 적군을 소멸시키며 우세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템플 기사단은 이미 거의 모든 병력을 잃은 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