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사업
템플 기사단은 동방에서의 군사 활동과 기사단 운영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경제적·상업적·금융적 활동을 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오늘날의 은행 업무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교회는 이자를 받는 거래, 즉 고리대금업(Usury)을 기독교인에게 금지했으며,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구약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에게 이자를 붙여 돈이나 음식, 또는 이자가 붙는 어떤 것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템플 기사단은 순례자, 십자군, 상인, 수도원 회중, 성직자, 왕과 제후 등 각계각층에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상환 금액이 원금보다 많아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통화 환전 행위로 위장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널리 쓰이던 규정 회피 방식이었습니다.
루이 7세의 십자군 원정 당시, 프랑스 국왕은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마자 템플 기사단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기사단장 에브라르 데 바레(Evrard des Barrès)는 필요한 조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자신의 집사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템플 기사단에 대해 "그들의 도움과 지원 없이는 이 나라들[동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기사단이 자신들의 명의로 상당한 액수를 빌려주었으므로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금액은 은 2천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환어음의 발명
기사단의 금융 활동 덕분에 개인들은 예루살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로마로 순례를 떠나기 전 재산을 기사단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템플 기사단은 바로 이 과정에서 '예금증서'를 발명했습니다.
순례자가 여행에 필요한 금액을 템플 기사단에 맡기면, 회계 담당 형제는 입금된 금액이 적힌 서한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친필 서명과 인증을 갖춘 이 문서가 바로 '환어음'입니다. 순례자는 현금을 몸에 지니지 않고도 훨씬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의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현지 화폐로 전액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템플 기사단은 순례자를 위한 환전 서비스를 발전시키고 하나의 제도로 정착시킨 셈입니다.
템플 기사단의 보물
보물이란 화폐와 보석, 그리고 기록 보관소 역할까지 겸하는 잠긴 궤를 의미합니다. 이 금고는 '헛치(hutch)'라고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기사단장이 회계 업무를 직접 수행했으나, 13세기 말에 이르러 기사단 재무관에게 이관되었습니다. 회칙 중 출납 관련 세 조항을 통해 기사단의 재정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사단장은 금액의 크기에 따라 참모들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무이자 대출을 승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방 속령(코망드리)의 수입은 예루살렘 본부의 기사단 금고로 납부되었습니다.
백 비잔티움(bezants)을 넘는 모든 금전 기부금은 기사단 금고에 집중되었습니다. 파리와 런던의 코망드리는 각각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보관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각 코망드리는 궤에 보관된 보물 덕분에 자체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307년 템플 기사단이 일괄 체포되었을 때 발견된 중요한 궤는 단 하나, 프랑스 순회감찰관 위그 드 페로(Hugues de Pairaud)의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안의 돈은 국왕에 의해 몰수되어 곧바로 왕실 금고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왕실 금고의 관리
이 전통은 1146년,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왕실 금고를 파리 템플 성전에 맡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이 관행은 점차 확대되어 많은 군주들이 기사단의 재무관들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 역시 왕실 금고를 템플에 맡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 하우스 소속의 많은 템플 기사들이 왕실 고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템플 기사단의 유산
템플 기사단의 건축 유산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서방에 위치한 '코망드리(commanderie)'라 불리는 수도원 형태의 거점과, 근동 및 이베리아 반도에 세워진 요새들입니다.
예루살렘 템플 본부
예루살렘의 템플 건물은 기사단의 본거지로, 기사단장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