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바이아 음모 사건(Conjuração Baiana): 브라질 '재단사들의 음모'와 그 비극적 결말

바이아 음모 사건이란?

바이아 음모 사건(Conjuração Baiana)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브라질 전역에서 일어난 이른바 '토착민 반란(Nativist Rebellions)'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이아 음모 사건(Conjuração Baiana): 브라질  재단사들의 음모 와 그 비극적 결말

글: Me. Cláudio Fernandes

17세기 중반, 상업과 노예제에 기반한 식민지 체계가 자리 잡은 이후 브라질은 광대한 영토 곳곳에서 수차례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 반란들은 대부분 브라질 태생의 사람들에 의해 조직되었기 때문에 여러 연구자들은 이를 '토착민 반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미나스 음모(Inconfidência Mineira)가 꼽히는데, 바이아 음모 역시 그 대열에 속하는 사건입니다.

'재단사들의 음모'라 불린 이유

바이아 음모는 '재단사들의 음모(Conjuração dos Alfaiates)'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참여자의 상당수가 가난한 메스티소, 하급 군인, 자유민 또는 해방 노예 출신 흑인, 그리고 도시의 각종 전문직 종사자들, 그중에서도 많은 재단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보리스 파우스투(Boris Fausto)에 따르면, 이 음모(conjuração는 '공모'라는 뜻)는 토착민 반란이라는 큰 흐름과 맞닿아 있는 동시에, 당시 살바도르 시의 참혹한 생존 환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 식량 부족과 기근은 1797년부터 1798년 사이 도시 곳곳에서 여러 차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예컨대 살바도르 총사령관에게 보낼 대량의 고기를 나르던 노예들은 굶주린 군중에게 습격을 받았고, 실어 나르던 짐은 습격자들과 길거리에서 먹거리를 파는 흑인 여성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1]

보리스 파우스투의 이러한 묘사는 당시 바이아를 짓누르던 극심한 결핍의 실태를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

음모가들은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혁명 세력의 권리 투쟁에서 영감을 받아 공화국 선포, 노예제 폐지, 자유무역 도입 등 진보적인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념적 기반과 지지 세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모는 본격적인 정치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주모자들이 곧바로 바이아 정부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극으로 끝난 반란

1799년 11월 8일, 네 명의 지도자는 살바도르의 캄푸 다 폴보라(Campo da Pólvora)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 신체가 사분되었으며, 나머지 공모자들은 추방형 또는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미나스 음모의 지도자 티라덴치스(Tiradentes)가 교수형과 사분형으로 처형되어 본보기가 된 것처럼, 바이아의 네 명의 지도자 역시 같은 혹독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반역죄는 포르투갈 왕실과 그 아래에 속한 브라질 총독부가 가장 엄중하게 다스려야 할 중대 범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주석:

[1] Boris Fausto, História do Brasil. 상파울루: 상파울루대학교 출판부(EDUSP), 2013, p.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