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는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변경백국(마르크)이자 선제후국으로, 오늘날 독일 북동부의 저지대에 자리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을 세우는 토대가 된 왕조 권력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 내 프로이센 자유주(州)의 한 주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이센이 해체되면서 오데르 강 서쪽 지역이 별개의 주로 재편되었고, 1952년 동독 정부가 기존 주를 새로운 현(Bezirk)으로 개폠했을 때 브란덴부르크의 옛 행정 정체성은 잠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1990년 동서독 통일 직전 브란덴부르크 주가 새롭게 재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슬라브족의 땅에서 게르만의 변경으로
이 지역에 처음 거주한 고대 부족은 셈노네스(Semnones)였으며, 이들은 이후 슬라브족에게 대체되었습니다. 독일인의 정복은 919~936년 재위한 게르만 국왕 하인리히 1세(포수왕)가 슬라브계 하벨리(Havelli) 부족의 거점 브라니보르(Branibor)를 함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슬라브족이 일시적으로 게르만 세력을 밀어냈으나, 작센 공작(훗날 게르만 황제) 로타르와 함께 1134년 노르트마르크(북방 변경백)에 임명된 '곰' 알브레히트 1세가 본격적인 게르만의 정복·식민화·기독교화를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은 알브레히트의 후손인 아스카니아 가문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슬라브족은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점차 동화되었고, 브란덴부르크는 13세기에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베를린 역시 이 시기 신설된 여러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브란덴부르크의 영역은 엘베 강 서쪽의 알트마르크(구 변경), 엘베 강과 오데르 강 사이의 미텔마르크(중앙 변경), 오데르 강 동쪽의 노이마르크(신 변경)로 구분되었습니다.
선제후 지위의 확립과 아스카니아 가문의 몰락
12세기 중반 브란덴부르크의 군주는 제국 선제후(신성 로마 황제 선출에 참여하는 제후)로 인정받았고, 이 권리는 1356년 카를 4세 황제의 금인칙서(Goldene Bulle)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스카니아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계통이 1320년 단절된 뒤 선제후국은 분열과 혼란에 시달렸습니다. 룩셈부르크 출신 독일왕 벤첼(1373~1378년 통치)의 통치는 강력한 정부 운영의 한 예였지만, 대체로 지역 귀족들이 선제후를 압도했고 한때 자유민이던 농민들도 상당한 권력을 잃었습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집권과 국력 강화
1415년 신성 로마 황제 지그문트가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리드리히를 선제후로 임명하면서 브란덴부르크의 강력한 중앙 통치가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아이젠찬'(재위 1440~1470)은 반항적인 귀족과 도시들을 억눌렀고, 포메라니아와의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재위 1470~1486)가 마침내 포메라니아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습니다.
요아힘 1세(재위 1499~1535)는 브란덴부르크에 로마법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선제후 요아힘 2세와 요한의 치세에 루터교가 받아들여졌고, 세속화된 주교령들이 가문에 상속되었습니다. 요아힘 2세(재위 1535~1571)는 실레지아에 발판을 마련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1569년 호엔촐레른 친족인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와 맺은 협약입니다. 이를 통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공국의 공동 수임권과 공작 가문이 단절될 경우의 상속권을 보장받았습니다.
프로이센 상속과 30년 전쟁의 시련
선제후 요한 지그문트(재위 1608~1619)는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안나와 결혼해 상속권을 강화했고, 1618년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았습니다. 또한 클레페, 마르크, 라벤스베르크를 획득하여 서독 지역 호엔촐레른 세력의 핵심을 구축했습니다.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재위 1620~1640) 치세에 브란덴부르크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30년 전쟁(1618~1648) 과정에서 스웨덴의 침입과 장기 점령이라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부상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이른바 '대선제후'(재위 1640~1688)는 선제후국을 스웨덴의 지배에서 해방하고 질서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동포메라니아, 세속화된 할버슈타트·민덴·캄민의 교구령,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을 획득했습니다. 이러한 영토 확장과 정치·군사적 활동을 통해 그는 독일 최대의 개신교 제후로 부상했으며, 탄탄한 재정 기반과 효율적인 군대, 관료제를 갖춘 유럽의 중요 국가로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1688년 5월 9일 그가 서거할 때 프로이센과 연결된 브란덴부르크 국가는 제국 내 제후국 가운데 오스트리아 다음가는 지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선제후는 독일 개신교의 지도자로 존중받았고, 영토는 약 10만 제곱킬로미터(약 4만 제곱마일)를 넘어섰으며 수입은 배로 증가했습니다. 규모는 아직 작았지만 탁월한 훈련으로 무적이던 그의 군대는 스웨덴이 예전에 누리던 정치·군사적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센 왕관의 획득: 프리드리히 3세
새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아버지가 남긴 성과를 더 유리한 조건에서 거두었습니다. 그는 1688년 오렌지공 빌럼의 잉글랜드 원정을 지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맞서 다른 독일 제후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진영에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과 싸웠습니다.
이 시기 그의 최고 참모는 에버하르트 당켈만(Eberhard Danckelmann, 1643~1722)으로, 대선제후의 개혁 사업에 크게 기여했지만 많은 적을 만든 끝에 1697년 실각하여 수년간 투옥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자신과 후손을 위해 프로이센 국왕의 칭호를 확보한 것입니다. 1692년 처음 제기된 이 문제는 1698년 스페인 왕위 계승 분쟁의 조짐이 보이자 황제 레오폴트 1세가 브란덴부르크를 회유하려는 상황 속에서 다시 추진되었습니다. 왕위 칭호는 제국 영역 밖에 있는 프로이센에서 취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대가로 프리드리히는 황제에게 8천 명의 병력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 내의 왕(König in Preußen)'을 자칭한 즉위식은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그의 말년은 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관여하고, 북방 전쟁의 변화무쌍한 국면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 쓰였습니다. 이 시기 브란덴부르크의 영토 확장은 크지 않았지만, 비교적 풍요로운 국정 덕분에 선제후는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건축에도 지출할 수 있었습니다. 1694년 할레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예술·과학 아카데미가 창설되었으며, 베를린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역사로
프리드리히는 1713년 2월 25일 서거했습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의 역사는 프로이센의 역사와 하나로 이어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