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이탈리아는 극심한 경제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1911~1912년 터키-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북아프리카 트리폴리를 획득했지만, 이 승리는 이탈리아의 경제 사정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이탈리아의 기회주의
1914년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의 문턱에 섰을 때,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따랐고, 온건한 사회당 지도자들이 간신히 노동자들을 달래 작업장으로 돌려보내던 중 대전쟁이 터졌다.
독일은 오랜 우호를 내세워 이탈리아의 참전을 요청했으나,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언하며 양측을 저울질해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 했다. 결국 연합국(영국·프랑스)이 재정 원조를 약속하며 이탈리아를 끌어들였고, 1916년 8월 이탈리아는 옛 동맹국 독일을 상대로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현금 보상과 터키 스미르나 지역 영유권을 약속받았으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며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와의 약속을 저버렸고, 이탈리아는 60만 명의 전사자와 100만 명의 부상자를 냈음에도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한 채 경제는 파탄 났다.
사회 혼란과 파시즘의 태동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실직자로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농민·노동자·제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920년 금속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로 '동맹 파업'이 벌어지자 공장주들은 직장 폐쇄로 맞섰다. 노동자들은 자물쇠를 부수고 공장을 점거해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운영하려 시도했다.
당시 이탈리아 의회 의석의 3분의 1을 사회당이 차지했고, 3,000여 기초자치단체와 노동조합도 사회당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 지도부는 연설만 할 뿐 실질적 행동에 나서지 못했고, 공장주들은 금세 통제권을 되찾았다.
공장주들은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어 노동자와 사회당에 대항케 했는데, 그중 1919년 무솔리니가 결성한 '파시 디 콤바티멘티(Fasci di Combattimento, 전투 파시)'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초기엔 농민과 노동자를 모집했으나, 곧 제대 군인들이 대거 합류하며 '전투 갱단'으로 변질됐다. 이들은 부르주아지와 공장주의 자금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신문사 사무실을 습격하고, 좌파 인사들을 폭행하며 좌파 계열 협동조합과 지자체를 파괴했다.
이들의 명칭 '파시(fasci)'는 고대 로마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파스케스(fasces, 도끼를 묶은 막대기 다발)'에서 유래했으며, 여기서 '파시즘(Fascism)'이란 용어가 탄생했다. 정부는 자본가와 폭력단의 횡포를 방관하며 이들이 거리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제압해주길 바랐다.
사회주의자에서 파시스트 지도자로: 무솔리니의 변신
1883년 대장장이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무솔리니는 어려서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 자랐다. 청년기엔 급진 사회주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온건파를 비난하고, 정부와 반대파에 폭탄 테러까지 옹호했다. 사회당이 터키 전쟁을 지지하자 이에 반대해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Avanti!)' 편집장이 된 그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처음에는 중립을 주장했다가 돌연 연합국 편 참전으로 입장을 바꿨다. 사회당에서 제명당한 그는 자원입대해 전선에서 중상을 입었고, 전후 사회당·정부·노동자 모두로부터 외면받는 '패배자'가 되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고, 1920년 제대 군인들을 규합해 파시즘 운동을 재건했다.
그는 "그들은 어떤 정강에도 얽매이지 않기에 한 목표, 즉 이탈리아 인민의 미래 복지를 향해 쉬지 않고 전진한다"고 선언했으나, 실상은 폭력 외에 어떤 이론도 신봉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폭력과 기만의 이중 플레이
여러 도시에서 노동조합과 파시스트 갱단이 유혈 충돌을 벌였으나, 온건 사회당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인내하라'고 만류하면서 저항은 사그라들었다. 이 틈을 타 파시스트 갱단은 전국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각 갱단은 지역 유지·공장주의 후원을 받았다. 정부는 파업 억제에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개입을 거부했다.
무솔리니는 교묘한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갱단은 부유층을 위해 일하면서도 구호는 항상 "가난한 자, 착취당하는 자, 농민, 노동자를 위하여"를 외쳤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오래된 수법을 베낀 것으로, 빈민의 지지를 얻으면서 실상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만적 파시즘'이었다.
그는 빈민 앞에서는 부자를 공격하고, 부자 앞에서는 '공장주가 망하면 노동자 일자리가 위태롭다'며 자본 옹호 연설을 했다. 양측 모두 '무솔리니는 내 편'이라 믿게 만드는 탁월한 선동가였다. 실업 상태의 중산층 청년들을 '빵값'을 주고 매수해 폭력단원으로 활용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일자리 보호를 위해 그에게 몰려들었다.
정부가 실업 대책도, 자본가 착취 단속도, 무솔리니 갱단 진압도 못하자 정국은 사실상 파시스트 폭력배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들은 물가를 멋대로 정해 상인들에게 강매시켰고, 빈민의 환심을 샀다. 군 복무 경력으로 장교들과 인맥을 쌓아 군부 고위층까지 포섭했다.
로마 진군과 정권 장악
무솔리니는 "우리의 강령은 단순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이라 선언하며 로마 진군을 계획했다.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를 묵인했고, 총리 니티가 계엄령을 선포하려 하자 국왕이 이를 취소하며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다. 1922년 10월 30일, 파시스트 부대가 로마에 입성한 날 무솔리니는 밀라노발 열차를 타고 총리 취임을 위해 로마로 향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집권한 무솔리니에게는 미래 청사진이 없었다. 그는 훗날 이탈리아 백과사전 기고문에서 "로마 진군 당시 미래 계획은 없었다. 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과 과거 사회주의 관행의 산물이었다"고 고백했다.
파시즘의 상징과 전체주의 체제 구축
당 상징은 고대 로마의 파스케스(도끼 든 막대 다발)였으며, 인사법도 로마식 거수 경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 제국 계승자로 포장하며 '논리 따위 없다, 오직 복종만 있을 뿐'이란 제국주의적 원리를 내세웠다. 지도자 무솔리니는 '일 두체(Il Duce, 지도자)'라 불렸고, 검은 셔츠 유니폼을 입은 단원들은 '흑셔츠단(Blackshirts)'으로 불렸다.
공포 정치의 서막
총리가 되자 무솔리니는 '정적 제거'라는 단일 정책을 추진했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지도자와 지지자가 암살됐고, 의회 의원들은 거리와 자택에서 구타당해 무솔리니 지지를 강요받았다. 국왕 후계자 임명권을 위원회에 넘기는 법안을 폭력 표결로 통과시켰고, 공개 연설에서 "이 선언은 에마누엘레 왕조의 종말을 위한 충분한 근거다"라며 국왕을 협박했다.
경찰을 무력화한 파시스트 갱단이 치안을 장악했고, 정적에게는 강제로 피마자유를 다량 먹여 살해하는 잔혹한 고문 방식이 자행됐다. 모든 공직은 파시당원에게 넘어갔다. 1924년 유명 사회주의자이자 의회 의원인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가 파시스트 선거 부정을 폭로한 연설 직후 납치·살해되자 유럽 전체가 경악했다. 형식적 재판 끝에 범인들은 풀려났고, 온건파 지도자 아멘돌라도 폭행 사망했으며, 전 총리 니티는 망명했고 그의 집은 방화됐다. 이 모든 일은 광기의 우발적 폭력이 아닌, 치밀한 계획하에 공개적으로 자행됐다.
절대 권력자 '일 두체'
무솔리니는 총리를 넘어 외무·내무·식민·육군·해군·공군·노동 장관을 겸임하며 사실상 내각 전체가 되었다. 노쇠한 국왕은 궁궐 한구석에 물러앉아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연설 때마다 독설을 퍼부으며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 위협했고, 프랑스를 향해 "자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탈리아 전투기들이 네 하늘을 뒤덮을 것"이라 공갈쳤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알면서도 '광기 어린 독재자'와 충돌을 피하려 침묵했다. 국제연맹 역시 그의 막말을 묵인했다. 국내 결속을 위한 선동용이며 실제 행동력과 의지는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바티칸과의 화해: 라테란 조약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며 1871년부터 이어진 분쟁이 종식됐다. 이탈리아 통일(1861) 후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1871년 로마를 점령해 수도로 삼자, 교황은 교황령 국왕으로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바티칸 궁과 성 베드로 성당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자발적 유폐' 상태에 있었다.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이 주권 국가로 인정받고 교황이 국가원수가 되었으며, 인구 수백 명 규모의 초소형 국가가 자체 법원·우편·우표·조폐·화폐를 갖게 됐다.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은 무솔리니에게 감사했고, 이는 그의 국내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럽으로 번진 파시즘의 불길
이탈리아 장악 후 무솔리니는 "유럽 모든 나라의 왕좌가 유능한 인물을 기다리고 비어 있다"며 팽창주의를 선동했다. 이 말에 고무된 각국의 극우 세력이 의회를 습격하고 입법을 강요하며 정권을 찬탈했다.
스페인이 대표적 사례다. 코르테스(Cortes)라 불리는 의회에 가톨릭 성직자 영향력이 컸고, 경제난과 미산업화로 빈곤·실업이 심각했다. 독일식 마르크스주의도, 영국식 온건 사회주의도 아닌 이탈리아식 파시즘을 택해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폴란드·유고슬라비아·그리스·불가리아·포르투갈·헝가리·오스트리아에서도 폭력배 출신 독재자가 들어섰고, 터키의 케말 파샤, 남미 여러 국가에서도 군부 독재가 득세했다. 무솔리니의 '마법'은 세계 절반 이상을 사로잡았다.
아비시니아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1935년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동북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발발해 1945년 끝나지만, 실질적으로 무솔리니의 아비시니아 침공이 세계대전의 첫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