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중간에 잠시 접어두었지만, 지금부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동로마 제국은 서기 395년에 출발하여 서기 480년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임명하는 역할을 했다.
서기 480년부터 565년까지 로마를 다스린 프랑크족 왕들은 동로마 제국의 통치자를 자신의 주군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상의 격식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 이 시기 로마의 통치자들은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었다. 이러한 형식적 복종이 유지된 이유는, 당시 로마를 통치하던 자들이 프랑크라는 외래 씨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에서 이민자로 취급받지 않았고, 그렇기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를 명분상의 주군으로 인정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이 비록 강대해졌음에도 로마가 여전히 콘스탄티노플보다 더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공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교황에게 돌아간다.
로마와 교황은 특히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계에서 동로마 제국보다 더 높은 존경과 권위를 누렸다. 그럼에도 동로마 제국은 장점과 단점, 영화와 몰락을 모두 안은 채 서기 1453년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1453년, 드디어 멸망의 암운이 콘스탄티노플 상공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선지자의 터번이 교황의 관보다 낫다'
서기 1453년, 오스만 튀르크(오스만 제국)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교황에게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상태였다. 무슬림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자 일부 제후들은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비잔티움의 저명한 귀족 루카스 노타라스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술탄의 터번이 교황의 관보다 낫다.'
이러한 여론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은 무슬림 군대에 별다른 저항 의지를 보이지 못했고 결국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1453년 5월 29일 최후의 항전 끝에 목숨을 잃었다. 서기 326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94명의 황제와 6명의 여제가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했다. 물론 이 수치에는 공동 황제나 부황(副皇)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슬림 술탄들이 가져간 '카이사르' 칭호
오스만 튀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이라 불렀다. 메흐메트 2세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세운 웅장한 대성당 '성 소피아(산타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고, 교회의 재산을 모두 거두어 갔다.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를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이자 로마의 계승자로 선포했고, '영광의 술레이만'으로 알려진 술레이만 1세 역시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무슬림 군주들이 카이사르의 칭호를 차지하면서, 유럽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유럽인은 무적이다'라는 자만심은 산산조각 났다.
미스트라스와 트라페준트의 멸망
콘스탄티노플이 튀르크의 손에 넘어간 뒤에도, 동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인 통치자들의 나라가 몇 년 더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마침내 미스트라스(모레아 전제공국)는 1460년에, 트라페준트 제국은 1461년에 차례로 멸망하며 고대 로마의 마지막 불씨도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로마 상공에 드리운 위협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오스만 튀르크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야망이 싹텄다. 이곳에서 유럽으로 통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오스만 튀르크는 이 길을 따라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독일과 헝가리를 정복했고, 이제는 로마와 빈을 노려보았다.
헝가리를 정복한 뒤에는 이탈리아 국경과 빈 성벽 앞까지 진격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당시 빈은 절정의 국력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덕분에 빈은 로마를 지키는 방패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튀르크가 유럽에 발을 딛고 있는 한, 로마 하늘에서 위험의 구름이 걷히는 일은 없었다.
예니체리: 기독교 어머니의 아들, 무슬림 군인
튀르크는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을 이슬람화하는 독특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대신, 그들의 어린 아들을 데려갔다. 이 아이들은 군인 귀족처럼 길러졌고 이슬람 교육을 받았는데, 이들이 바로 '예니체리'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니체리는 콘스탄티노플 지역에서 강력한 군단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유럽 출신 무슬림 집단이었다. 그들의 피는 로마인의 것이었지만 교육은 이슬람의 것이었다. 생활 양식은 귀족적이었으나 직업은 전쟁이었다. 기독교 어머니의 품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사명은 기독교를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이 뛰어난 무슬림 군인들은 이슬람에 크게 이바지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의 이름조차 지워 버렸다. 유럽 여러 나라는 튀르크에 맞서 힘을 꺾었지만, 그럼에도 이후 455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 영광의 끝
튀르크를 유럽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의 일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역시 연합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무슬림 술탄은 영국의 괴뢰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상황도 오래가지 못했다.
몇 년 뒤, 튀르키예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 파샤(케말 아타튀르크)는 영국 세력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몰아냈다. 그는 튀르키예에 공화제를 확립했고,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는 새로운 무슬림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곧 튀르키예 정부는 수도를 앙고라, 즉 앙카라로 옮겼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외면받는 평범한 도시로 남게 되었다. 위대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영예를 잃은 그 도시는, 이제 작은 나라의 수도 자리마저 내려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