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종교와 언어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 동파키스탄 힌두교도와 비하리 무슬림의 비극

종교와 언어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 동파키스탄 힌두교도와 비하리 무슬림의 비극

분단의 그늘, 상대적으로 잠잠했던 벵골

1947년 인도 분단 당시 북서 변경주에서 펀자브·신드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종교를 명분으로 한 격렬한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인도 동부 국경에 위치한 벵골은 상대적으로 평온한 편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평온함을 간디의 공로로 돌리지만, 사실 벵골은 이미 1946년 하반기 '직접 행동의 날'과 이후의 유혈 사태로 피바다를 겪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1947년 분단 당시 벵골의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은 대체로 유혈 사태 없이 서벵골과 동파키스탄 사이를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1~2년 후, 동파키스탄에는 불만과 폭력의 물결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종교와 언어, 두 가지 명분으로 번진 살육

분단 당시 펀자브와 신드에서는 종교를 기준으로 혼란과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벵골에서는 종교뿐 아니라 언어 역시 살육의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비하리 무슬림들의 처지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역사는 그들을 발디딜 땅조차 남겨두지 않을 만큼 몰아붙였다.

동파키스탄에서 힌두교도들이 박해를 받거나 살해되면 그들은 인도로 피신했다. 그런데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비하리 무슬림들이 벵골어를 쓰는 무슬림들에게 박해받거나 살해될 때에는, 얼마 전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가진 이들이 종교를 이유로 떠나갔던 바로 그 나라, 즉 인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벵골어를 쓰는 무슬림들은 한쪽에서는 같은 언어를 쓰는 힌두교도들을 살해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르두어를 쓰는 비하리 무슬림들을 추방했다. 동파키스탄 전역이 피로 물들었고, 서벵골은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쳐 온 난민들로 가득 찼다.

샤마프라사드 무커지의 강경한 요구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0년 4월 8일 네루-리아카트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델리 협정'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양국 총리는 소수자 보호와 공동체 간 폭력 방지의 책임을 맡았으며, 소수자들이 자국을 떠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실향민 재정착 대책을 마련할 의무도 함께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재정착·물자공급부 장관인 샤마프라사드 무커지 박사는 벵골 분할을 철회하든가, 아니면 파키스탄으로부터 실향민 정착용 추가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네루 총리는 그의 제안을 비현실적이라며 일축했다. 이에 분노한 샤마프라사드 무커지와 크시티쉬 찬드라 요기는 1950년 4월 8일 네루 내각에서 사임했다.

끝나지 않은 난민의 행렬

1954년, 다시금 대량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54년에는 월평균 6,600명의 실향민 힌두교도가 인도로 들어왔다. 1955년에는 이 수치가 월평균 13,500명으로 늘어났다.

그다음 해에는 월평균 2만 명을 넘어섰다. 1956년 1월에는 1만 9,206명, 2월에는 4만 3,534명의 힌두교도가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들어왔다. 1956년이 끝날 무렵까지 인도로 이주한 힌두교도는 총 32만 명에 달했다.

이에 대해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이 문제는 카슈미르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복잡하다”고 언급했다.

1956년 4월, 인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들어오려는 실향민들에 대한 통과 규정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실향민 유입 속도는 다소 늦어졌지만, 흐름 자체는 계속 이어졌다. 인도 정부의 재정착 장관 엠.씨. 칸나(MC Khanna)는 실향민들이 끊임없이 인도로 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은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안전하지 못하고 차별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도로 오는 것입니다. 1957년에는 1만 920명, 1958년에는 4,898명의 힌두교도가 인도로 들어왔습니다.”

1958년 아유브 칸이 파키스탄에 군사 통치를 확립한 이후, 동벵골은 서파키스탄 출신 군인들의 총검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