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과 사탕수수로 가득했던 번영의 마을
영국 식민 통치 시절 설치된 연합주(United Provinces)는 독립 이후 우타르프라데시주(Uttar Pradesh)로 이름을 바꿨다. 아메드푸르 차우롤리는 이 주 서부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분할되지 않은 펀자브와 연합주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야무나 강에서 10~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변에는 밀과 사탕수수 들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고, 땅 구석구석마다 풍요가 넘치는 번영의 고장이었다. 수백 년 동안 다양한 카스트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아왔다.
무굴 시대부터 이어진 마을의 역사
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번영에 끌린 샤지 세드우람(Shahji Sedhuram)은 무굴 제국 시대에 인근 라네라(Ranhera) 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그에게는 랄라 케왈람(Lala Kewalram)과 랄라 카시람(Lala Kashiram)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성실한 후손들은 크게 발전했다.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 체결로 영국이 무굴 황제를 연금 신분으로 물러나게 하면서 차우롤리 지역 역시 영국령에 편입되었다. 영국은 자민다리(Zamindari, 토지 지주) 제도를 기반으로 새로운 징세 체계를 국가 전역에 도입했다. 랄라 카시람의 후손들 역시 차우롤리와 그 주변에 넓은 자민다리를 매입했고, 이들은 '라이스(Rais)'라 불리는 유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주변 어느 마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 마을에는 웅장한 하벨리(저택), 노흐라(정원 저택), 랄라들의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1947년, 분할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1947년 6월 4일 마운트배튼 계획이 발표되고 인도 분할까지 며칠을 앞둔 시절, 차우롤리 마을에도 당시 인도의 모든 마을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불안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통가(말마차)를 몰며 생계를 꾸리던 무슬림 가족이 단 한 곳 있었는데, 그 집의 젊은이는 매주 금요일이면 모스크가 있는 인근 주와르(Jewar) 마을에 나가 예배(나마즈)를 드렸다.
그 무렵 일부 모스크에서는 파키스탄 건국을 위한 성금이 모금되기 시작했다. 마을의 한 젊은이도 어떻게든 파키스탄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0루피를 내놓았다. 통가로 생계를 잇던 가정에게 200루피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조지 6세의 은화 반짜리 1루피 동전이 통용되던 시절로, 그 화폐 가치는 오늘날 약 400루피에 해당한다.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이 지역 전체에는 "8월 15일이 되면 온 나라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글의 원저자인 기리라지 프라사드 굽타(Giriraj Prasad Gupta) 씨의 아버지 역시 그 젊은이 중 한 명으로부터 폭동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먼 시골 마을까지 이름이 알려져 깊은 존경을 받던 학교 선생님, 판디트 카란싱지(Pandit Karansinhji)에게 이를 물었다. 판디트는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완전히 평온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판디트의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8월 15일이 밝아왔을 때 마을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야무나 강 건너편에서 온 위협, 메오족
마을 사람들의 형제애 덕분에 차우롤리와 그 주변 마을들은 대체로 평온을 유지했지만, 약 10~12km 떨어진 야무나 강 건너편에서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야무나 건너 지역은 분할되지 않은 펀자브에 속해 있었으며, 지금은 하리아나주에 속한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리와리-구르가온(Rewari-Gurgaon) 지역에서는 메오(Meo)족이 별도의 '메바스탄(Mevasthan)'을 세우기 위해 무력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마하바라타의 서사와 신화적 전승에 따르면, 메바스탄으로 제안된 그 땅은 바로 크리슈나 신과 아르주나가 칸다바 숲을 불태워 뱀들을 소멸시켰던 곳이다. 1947년경 이 일대에는 메오족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는 메오족이 대규모로 집결해 야무나 강 건너 마을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메오족의 계획은 이 일대에서 힌두교도들을 몰아내고 지역 전체를 메바스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이러했다. 펀자브가 파키스탄에 넘어가는 만큼, 메오족이 세우려는 메바스탄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위치하게 되어 파키스탄에 손쉽게 합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몽둥이와 창으로 맞선 농촌 청년들
메오족의 소식이 전해지자 차우롤리와 인근 여러 마을의 힌두 청년들은 몽둥이, 발람(투창), 창을 들고 야무나 강 건너, 공격 가능성이 있는 마을들로 향했다. 이곳은 농업 마을로서 어느 집에서 검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들녘을 짐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몽둥이와 창을 갖춰 두었을 뿐이다.
무장한 메오족이 공격해오자 힌두 청년들은 그들의 진로를 막아서고 리와리 방면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투쟁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저자의 할아버지인 무쿤딜랄 굽타(Mukundilal Gupta) 씨도 있었다. 당시 그는 가문의 유일한 성인 남성이었지만, 집안 여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에 나섰다. 메오족이 물러난 지 나흘쯤 지난 뒤 마을 청년들은 무사히 돌아왔다.
가르강가 보름 장터의 소동
그 시절 가르강가(Garh-Ganga)에서는 보름마다 장이 열렸다. 이 때면 차우롤리 마을에서는 20~25대의 짐수레를 이끌고 갠지스 강 목욕을 하러 사람들이 떠났다. 이 일대에는 무슬림 마을도 많았다. 공동체 폭동이 절정에 달했던 어느 보름 장날,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때 이런 말이 회자되었다. '가르강가의 자트(Jat)족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저토록 무사히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폭동 이후 혼란 속에서 일부 청년들은 약 25~30명의 여성들을 붙잡았다. 그들은 탈것에서 승객들을 내리고 붙잡은 여성들을 태웠다. 차우롤리와 주변 마을의 미혼 청년들은 그 여성들과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이와 관련된 무크타카(독립운율 민요)도 지어졌는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삼밧(Samvat) 2003년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수트네 도티 도티 도티 삭떼 해…….."
"강가지 운 나흐바-나흐바 강가데이, 그 이름은 다라…….."
작은 마을의 사건들이 말해주는 것
차우롤리 같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런 사건들은 산발적인 일로 치부될 수 있지만, 당시 북인도의 마을들에서는 이런 광경이 극히 흔했다. 많은 사람이 폭동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부상을 입은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의 명예가 짓밟혔다.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새 가정의 품에 안겨진 그 여성들은 그야말로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