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이블 총독의 실각, 그리고 마운트배튼의 부임
부총왕 겸 총독 웨이블 경(Lord Wavell)은 인도 정치에서 실패한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1945년 6월 시믈라 회담에서 부총왕 자문회의에 무슬림 인사를 임명하는 문제를 두고 국민회의당과 무슬림 연맹 사이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46년 8월 무슬림 연맹이 '직접 행동'을 감행하면서 벵골과 비하르 지역이 유혈 사태로 얼룩졌고, 웨이블 총독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1947년 3월, 마운트배튼 경(Lord Mountbatten)이 인도 부총왕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풀네임은 루이스 프랜시스 앨버트 빅터 니컬러스 조지 마운트배튼(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George Mountbatten)이며, 버마의 초대 마운트배튼 백작(First Earl Mountbatten of Burma)으로도 불렸다. 그는 바텐베르크 공가 출신으로 영국 왕실의 일원이었다.
영국 왕실의 일원이자 해군 제독
마운트배튼은 영국 해군의 제독이었다. 영국 정부로부터 KG, GCB, OM, GCSI, GCIE, GCVO, DSO, PC, FRS 등 수많은 훈장과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00년 6월 25일 잉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인 필립 공(에든버러 공작)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그는 인도의 마지막 부총왕이자 독립 인도의 초대 총독이었다. 명확한 비전과 확고한 신념을 지닌 탓에 마운트배튼의 인격은 매우 빛났다. 그는 설득력 있는 웅변가이자 유능한 장군이었고,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였다. 영국을 위한 전략적 성공들을 거두면서 그는 영국 의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지지자였지만, 영국 왕실의 일원이자 영국 역사에 밝았던 그는 인도의 번왕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 에드위나(Edwina)는 소박한 성품과 온화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전장에 나아가 부상자를 치료하고 공익 활동에 헌신하며 남편의 일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운트배튼을 보좌한 핵심 참모진
마운트배튼의 참모총장에는 이즈메이 경(Lord Ismay)이 임명되었다. 이즈메이는 원숙한 장교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언론 담당관에는 앨런 캠벨 존슨(Alan Campbell Johnson)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1939년부터 마운트배튼의 참모진에서 근무해 온 인물이었다.
인도 문관단의 고위 관리였던 조지 어벨 경(Sir George Abell)은 마운트배튼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펀자브 주지사의 비서관과 웨이블 경의 비서관을 지낸 경험이 있어 인도의 문제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조지 어벨은 마운트배튼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인도의 현재 상황은 불길이 치솟고 선창에는 화약이 가득 찬 배와 같습니다. 문제는 불이 화약에 먼저 닿느냐, 아니면 그 전에 우리가 통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코필드 경의 한계와 그 대가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콘래드 코필드 경(Sir Conrad Corfield)은 부총왕의 정치 고문 겸 정치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0년 리딩 경(Lord Reading) 시절 인도 문관단 장교로 인도에 왔으며, 그의 업무는 주로 인도 번왕국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하이데라바드, 리와, 자이푸르 등 여러 번왕국에서 정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웨이블 경 시절에는 왕실 대표, 즉 부총왕의 정치 고문으로 임명되어 웨이블과 번왕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인생 대부분을 인도 번왕들과 함께 보낸 그는 번왕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지만, 인도 지도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하이데라바드의 나와브(Nawab)는 그의 친구였기에, 코필드는 힌두 번왕보다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더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마운트배튼은 코필드 성격의 이러한 약점을 제때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훗날 사르다르 파텔과 자와할랄 네루 같은 인도 지도자들 앞에서 굴욕을 당해야 했다.
마운트배튼에게 주어진 거대한 과제
부총왕 겸 총독으로서 마운트배튼의 임무는 단 하나, 인도를 해방시키고 영국인을 완전한 품위와 평화 속에 안전하게 인도에서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1947년 3월 24일 인도 부총왕 겸 총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인도는 매우 기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인구는 약 3억 5천만 명으로, 그중 1억 명은 무슬림, 2억 5천만 명은 힌두교도 및 기타 종교 신자였다. 인도 최대 정당인 국민회의당은 힌두교도·시크교도 및 기타 종교 신자의 100%, 그리고 무슬림의 90%가 자신들을 따른다고 믿었다. 반면 무슬림 연맹은 인도 내 무슬림의 90%가 연맹을 지지한다고 확신했다.
복잡하게 얽힌 인도 정치 세력들
국민회의당은 영국이 인도의 권력을 회의당에 넘긴 뒤 떠나기를 원했다. 반면 무슬림 연맹은 영국이 먼저 인도를 분할해 무슬림을 위한 별도의 국가를 만든 후 인도를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즉, 힌두교도 다수 국가의 권력은 국민회의당에, 무슬림 다수 국가의 권력은 무슬림 연맹에 넘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세 번째 큰 세력은 인도의 번왕들이었다. 그들은 인도가 해방되더라도 565개 번왕국을 국민회의당에 넘겨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인도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과 민족주의·힌두 색채가 강한 정당들, 특히 힌두 마하사바(Hindu Mahasabha)는 영국이 인도를 분할해서는 안 되며, 인도는 통일된 채 권력이 국민회의당만이 아니라 인도의 모든 정당에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가에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시크교도, 달리트, 기독교도, 앵글로-인디언들도 저마다 자신들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마운트배튼은 이 모든 세력과 부딪히고 그들을 만족시켜야 했으며, 동시에 영국 관리들과 군인들, 그들의 가족과 재산까지 안전하게 인도에서 잉글랜드로 데려가야 했다. 또한 왕립군이 인도를 떠나는 시점에 무법자와 폭도, 살인자들이 무고한 인도 백성을 습격해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인도 국민이 자유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그들의 재산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여성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렇게 많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마운트배튼 경은 그의 모든 전임 부총왕들보다, 심지어 인도를 정복한 자들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첫 연설과 애틀리 정부에 보낸 첫 보고서
마운트배튼은 인도에서의 첫 연설에서 자신의 직책이 더 이상 일반적인 부총왕의 그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영국 정부의 발표에 따라 1948년 6월까지 권력을 이양하고, 몇 달 안에 인도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마운트배튼은 1947년 4월 2일 애틀리(Attlee) 정부에 첫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국내의 내부 긴장은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아무리 신속히 조치를 취하더라도 내전이 발발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후 마운트배튼은 간디, 진나, 네루, 리아카트 알리, 파텔과 차례로 회담을 가졌다. 이 지도자들은 마운트배튼에게 인도의 독립과 분할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 그리고 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