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16일 발표된 캐비닛 미션 계획(Cabinet Mission Plan)은 권고안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그 성격은 결코 가벼운 제안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상 하나의 중대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 계획이 공개되면서 인도에서의 캐비닛 미션의 임무는 완수되었고, 이제 미션은 영국으로 귀국할 일만 남았다.
인도를 떠나기 전 미션은 인도 언론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캐비닛 제안은 내부 혼란과 갈등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인도인들에게 하루빨리 자유를 부여하는 방안이다."
1946년 6월 29일, 캐비닛 미션은 적어도 제헌의회라도 구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도를 떠났다. 크립스(Cripps)와 페식 로렌스(Pethick Lawrence)는 영국 의회에서 "미션은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고 선언했다.
인도 국민회의의 승인
캐비닛 계획이 국민회의(Congress)의 바람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계획에 제시된 주 연합(provincial grouping)이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A'권역 전체와 'B', 'C'권역의 일부 주들이 연합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네루의 판단은 정확했다. 펀자브와 벵골의 힌두교도들은 이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도끼로 제 발을 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네루는 1946년 7월 6일~7일 열린 국민회의 노동위원회 회의에서 캐비닛 계획의 수용을 정식으로 제안했고, 이 안건은 찬성 205표 대 반대 51표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국민회의는 캐비닛 계획을 수용했다.
토후 왕들의 승인
캐비닛 미션을 통해 토후 왕들의 오랜 소망도 실현될 전망이 되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1817~18년 이전, 즉 완전히 독립적인 국가였던 시절의 지위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46년 7월 17일 개최된 나렌드라 만달(Narendra Mandal) 회의에서 왕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국자의 면모를 과시하며 선언했다. 나렌드라 만달은 국가의 소망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인도는 즉각 정치적 영광을 회복해야 하고, 토후들은 헌법 문제 해결이라는 과업에 가능한 모든 기여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승인
캐비닛 미션 계획에는 파키스탄 건국 요구가 직접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대신 힌두 다수, 무슬림 다수, 그리고 무슬림이 근소하게 우세한 주 입법의회의 구성을 기준으로 'A', 'B', 'C' 세 개 권역이 설정되었고, 각 권역은 자신들만의 별도 헌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되었다.
진나는 이 연합 계획 속에서 장차 파키스탄이 탄생할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파키스탄을 직접 얻지 못하더라도 이 계획을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캐비닛 미션 계획을 검토하기 위해 소집된 무슬림 연맹(Muslim League) 회의에서 통과된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완전한 주권 국가 파키스탄의 실현은 인도 무슬림들의 불변의 목표로 남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계획의 장기적 부분과 과도기적 부분을 모두 수용한다. 미션 계획 속에 파키스탄의 기반이 이미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나는 캐비닛 미션이 설계한 틀 안으로 들어갔고, 인도 독립의 길이 열린 듯 보였다. 지난 15년간 인도 민중의 피와 무슬림 연맹 지도자들의 땀을 쏟아가며 "영국이 인도를 해방하기 전에 인도를 산산조각 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온 바로 그 진나가, 정작 인도를 분할하지 않은 채 영국이 떠나도록 묵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치에 관해 몇 페이지만 읽어본 평범한 사람이라도 눈치챘을 것이다. 진나가 머지않아 자신의 결정에 대한 끔찍한 후회의 불길에 타오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