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 분단된 인도의 첫 번째 지도를 그리다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 분단된 인도의 첫 번째 지도를 그리다

무함마드 이크발은 '알라마 이크발(Allama Iqbal)'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877년 11월 9일 펀자브 지방의 시알코트(현재 파키스탄 영토)에서 태어났다. 흥미롭게도 이크발의 조상들은 카슈미르 시바파를 믿던 브라만이었다. 이 가문은 쇼피안에서 쿨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스프란(Spran)'이라는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사프루(Sapru)'라 불렸다.

개종의 역사가 담긴 가문

이크발의 아버지는 비르발, 할아버지는 칸하이얄랄이며, 선조인 라탄랄 사프루는 시바파 브라만이었지만 교육받지 못한 재단사였다. 마을에서 명망을 얻지 못하자 그는 스프란을 떠나 스리나가르로 향했고, 그곳에서 카슈미르의 아프간 수베다르(지방 관리) 밑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수베다르를 대신해 세금을 걷는 일을 맡았는데, 어느 날 세금을 대량으로 횡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프간 수베다르는 그를 붙잡아 두 가지 선택지를 내걸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십자가형을 받거나. 결국 라탄랄은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그는 이름을 '셰이크 누르 무함마드(Sheikh Noor Mohammad)'로 바꾸고 카슈미르를 떠나 시알코트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이맘 비비(Imam Bibi)'라는 무슬림 여성과 결혼했고, 이 부부 사이에서 이크발이 태어났다. 이맘 비비는 겸손하고 헌신적인 여성이었으며, 아들 이크발을 공부시키기 위해 영국으로 보냈다.

유럽 유학과 세 번의 결혼

이크발은 잉글랜드에서 한동안 공부한 뒤 독일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인도로 돌아온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구자라트 출신 의사 칸 바하두르 아타 무함마드 칸의 딸 카림 비비였으며, 이 사이에서 딸 미라즈 베굼과 아들 아프타브 이크발을 두었다.

이후 사르다르 베굼과 두 번째 결혼을 하여 아들 자비드 이크발을 얻었고, 1914년 12월에는 무크타르 베굼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카슈미르 정치와 종교관

이크발은 카슈미르에 대한 힌두 왕의 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하라자 하리 싱에 맞서 카슈미르 무슬림들을 선동했고, 카슈미르 판디트들이 마하라자 하리 싱을 지지하자 판디트들에게도 적대감을 품고 그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무함마드 이크발은 강경한 종교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슬람이 정신적 자유를 위한 투쟁 정신의 구현이며 모든 종류의 종교적 경험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이슬람은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살아있는 행동 원리였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며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종교라고 확신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

이크발은 '입술 위에 소원이 기도가 되어 다가온다(Lab pe aati hai dua banke tamanna meri)'는 노래를 작사했는데, 이 곡은 무슬림들의 국가(카우미 타라나)가 되었다. 또한 '온 세상보다 나은 우리 힌두스탄(Saare Jahan Se Achcha Hindustan Hamara)'이라는 노래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노래에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종교는 서로 원수 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Majhab nahi shikhata aapse me bair karna)'는 구절은 무슬림끼리 화해하라는 메시지로 해석된 반면, '우리는 거품이다'라는 은유에는 때가 되면 거품이 터져 흩어진다는 숨겨진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노래로 명성을 얻은 이크발은 이후 정계에 입문했다.

1930년 알라하바드 연설, 분단 인도의 첫 지도

이크발의 시와 저술은 인도 무슬림들 사이에 자신들의 역할이 힌두교도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1922년에는 조지 5세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1930년, 그는 인도의 신드와 펀자브 등의 주에 카슈미르를 합쳐 새로운 무슬림 국가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최초로 제시했고, 이에 감명받은 영국 정부는 그에게 '경(Sir)' 칭호를 수여했다. 그의 시는 이란에서 '이크발 라호리(Iqbal Lahori)'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1930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 연례 회의가 알라하바드에서 열렸다. 이크발은 의장 연설에서 무슬림들의 별도 정체성에 근거한 '별도의 무슬림 국가' 건설을 촉구하며 연방 설립을 옹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펀자브, 카슈미르, 북서부 주, 신드, 발루치스탄이 하나의 별도 국가로 통합되는 것을 보고 싶다. 대영 제국 내의 자치 정부든, 대영 제국에서 분리된 통합된 북서인도 무슬림 국가든, 그것이야말로 특히 북서인도 무슬림들의 궁극적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분단된 인도의 첫 번째 지도였다. 당시만 해도 '파키스탄'이라는 단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구상은 '무슬림 인도(Muslim-India)'라고 불렸으며, 이 개념에는 벵골이 포함되지 않았다. 무함마드 이크발은 런던에서 열린 원탁회의에도 참석했다.

죽음과 유산

이크발은 1938년 4월 21일 라호르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파키스탄의 국민 시인으로 추대되었다.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피르(Pir, 성자)'로 더 많이 불린다. 독일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파키스탄에 있는 그의 묘소는 인도의 수피 성인들의 영묘처럼 매일같이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