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드를 무슬림 다수 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
1930년 알라하바드 회의가 끝난 직후인 1931년, 런던에서 제1차 원탁회의(Round Table Conference)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무슬림 연맹(Muslim League) 대표들은 인도 입법 의회에서 무슬림 공동체에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을 배정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신드(Sindh) 지역을 새로운 무슬림 다수 주로 승격시켜 달라는 요구도 함께 제기했습니다.
1931년 무함마드 알리 진나(Jinnah)는 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 당사자 간의 협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넷은 (1) 영국 정부, (2) 인도 제후국(번왕국), (3) 무슬림, (4) 힌두교도였습니다. 그는 1938년에도 같은 논리를 되풀이했습니다.
영국이 꺾어버린 힌두-무슬림 화해의 물꼬
1932년에는 전 인도 차원에서 힌두-무슬림 화합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고, 통일 회의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회의가 구성한 위원회는 1932년 11월까지 힌두-무슬림 문제의 해결책에 상당히 근접해 있었습니다. 중앙 입법 의회에서의 무슬림 대표권과 관련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져, 무슬림에게 32%의 의석을 배정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원회의 작업이 마무리되기 전에 인도 장관 새뮤얼 호어(Samuel Hoare)가 개입하여, 영국 정부가 중앙 의회 의석의 33.33%를 무슬림에게 배정하기로 결정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습니다. 아울러 신드를 별도의 주로 분리하고 막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통일 회의의 모든 성실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932년 공동체 협정(Communal Award)
원탁회의로도 공동체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32년 8월 16일 영국 정부는 자신들의 명의로 '공동체 협정(Communal Award)'을 발표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 정부는 중앙 입법 의회 250석 가운데 비무슬림에게 105석(42%)을 배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인도 인구에서 힌두교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75%였습니다. 반면 무슬림은 인구가 25%에 불과했음에도 33%의 의석을 배정받았습니다.
원래 시몬 위원회(Simon Commission)는 중앙 입법 의회 250석 중 150석(60%)을 비무슬림에게 배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총리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가 이 의석 수를 42%로 축소해 버렸습니다. 힌두교도,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불교도가 정부와 무슬림에게 분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유럽인, 시크교도, 인도 기독교도, 앵글로-인디언, 제후국 번왕 등은 각 주 입법 의회에서 별도 선거구제를 통해 자기 공동체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또한 암베드카르(Dr. Ambedkar) 박사의 노력 덕분에 소외 계급(Depressed Classes, 달릿)은 별도 선거제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협정을 통해 영국은 '분열 통치(divide and rule)' 원칙에 따라 인도 내 무슬림 공동주의를 부추기고, 달릿에게 별도 대표권을 부여함으로써 힌두 사회를 분열시키며, 소수 집단에 과도한 비중을 두어 국민적 통합을 저해하고, 제후국 번왕들에게 별도 선거를 허용해 비민주적 세력을 키우며, 인도 내 진보 세력의 활동을 통제하고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종교와 직업에 따라 대표권을 나누어 배분함으로써, 영국은 인도를 새로운 문제의 늪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 계속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