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역사: 아테네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폴리스(도시 국가) 가운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전형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단어 하나의 정의조차 학자들마다 논쟁이 분분할 만큼 그 의미는 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스파르타처럼 경직되고 폐쇄적인 정치 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탄생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여정을 단계별로 살펴보겠습니다.

민주주의 탄생 이전의 그리스 상황

민주주의가 탄생하기 이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으로 퍼져 나가며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곡물을 재배하던 일부 평민들이 잉여 농산물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습니다.

여기서 폴리스의 기원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폴리스는 본래 요새에서 출발했으며, 그리스의 성인 남성은 평민이든 귀족이든 누구나 병사였고 각자 자신의 무장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 문화가 발달하고 금속 수입이 늘어나면서 무기 값이 저렴해졌고, 이제는 일반 서민도 갑옷과 방패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평민들이 고성능의 무장을 갖춘 호플리테스(중장보병)가 되었고, 그동안 주력이었던 귀족 기병대를 밀어내고 평민 호플리테스 부대가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경제력과 무력을 함께 지닌 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현상이었으며, 고대 그리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국방이 최우선 정치 과제였던 폴리스에서는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평민들은 참정권을 요구하며 귀족들과 정면으로 맞섰고, 이것이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테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유층이 크게 성장하고 시민들의 발언권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가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꽃핀 도시였습니다. 그 흐름을 대표하는 두 개혁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원전 7세기: 드라콘이 법을 성문화하여 '법에 의한 질서'의 토대를 마련
  • 기원전 6세기 초: 솔론이 귀족과 평민 사이의 중재자로서 대대적인 개혁 실시

솔론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였던 아테네를 발전시킨 경제 분야의 명수였습니다. 그는 노예 노동에 가려져 홀대받던 수공업의 가치를 높였고, 경쟁 도시와 차별화된 상업 특권을 부여하여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도시로 아테네를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리스 7현자 솔론의 개혁

솔론의 개혁은 경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은 재산에 따른 제한이 있긴 했지만 참정권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부채가 탕감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반발은 매우 뿌리 깊었습니다.

* 참고로 아테네에서는 빚 때문에 신분이 노예로 떨어지는 채무 노예제가 금지되었지만, 노예 제도 자체는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는 그리스 외부 출신 노예가 상당수 유입되었습니다.

참정권을 손에 넣었음에도 아테네 평민들은 여전히 소수 귀족의 지배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귀족 정치에 대한 반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만의 결구점이 된 인물이 바로 평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페이시스트라토스입니다. 솔론은 이러한 미래를 내다보고 시민들에게 그를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솔론은 개혁을 실현하고 참주 정치의 위험을 예견한 통찰력 있는 정치가로 평가받아, 그리스 7현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아테네 참주(僭主) 정치의 시작

평민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불만을 대변하며 집권한 인물이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입니다. 그는 대중의 지원을 등에 업고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귀족 회의 정치를 억누르는 독재를 행했습니다. 이른바 '참주'에 의한 참주 정치(티라니스)의 시작입니다.

고대의 정치 사상가들은 참주 정치를 악으로 규정했지만, 평민들의 지지가 절실했던 만큼 통치가 반드시 가혹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세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시대는 아테네의 전성기였다"고 평할 만큼 아테네는 크게 번영했습니다. 어쩌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진심으로 평민을 구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중소 농민들이 보호받으면서 평민 세력의 힘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주 정치의 폐단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대에 나타났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사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귀족 측의 반격을 짓누르는 억압 정치로 변질되었다는 설
  • 아테네 내부의 반대파뿐 아니라 경쟁 관계인 스파르타마저 아테네를 교란하려 개입했다는 설

어느 쪽이든, 억압적 체제에 반발한 세력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을 추방하면서 참주 정치는 막을 내렸습니다.

참주 정치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체감한 아테네 시민들은 이후 참주의 출현을 강하게 경계하게 되었고,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개혁을 단행합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란?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 정치의 새로운 기반으로 10부족제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전통적 혈연에 기반한 4부족제를 개편한 것입니다.

혈연에 기반한 4부족제는 말하자면 귀족 권력의 기반이 되는 제도였습니다. 이 체제를 과감히 바꾸면서 아테네는 민주주의에 한 걸음 더 다가갔습니다.

새롭게 도입된 10부족제는 지역 공동체인 '데모스'를 기반으로 하며, 각 지역에 평등한 자문 기구를 설립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후 행정 구역이자 군사 편성 단위로 사용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평등한 자문 기구로서는 10개 선거구에서 각 50명씩, 총 500명의 대표를 선출하는 500인 평의회가 심의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20세 미만은 발언권에 제한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아테네 시민권을 지닌 18세 이상 남성이라면 누구나 시민 집회(에클레시아)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는 동시에, 클레이스테네스는 정치 지도자가 참주가 되는 것을 막는 도편 추방제(오스트라키스모스)도 도입했습니다. 이로써 아테네는 확실하게 민주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