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배경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12월 2일 일으킨 쿠데타를 발판으로 스스로 황제에 올라 제2제정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라인 강 건너편에서는 독일 통일을 추진하던 프로이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자극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엠스 전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황제를 성공적으로 유도합니다. 나폴레옹 3세는 함정에 그대로 걸려들어 1870년 7월 19일 성급하게 전쟁을 선포했지만, 유럽 이웃 국가들의 지원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고, 즉시 투입 가능한 병력도 26만 5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프로이센 연합군은 60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뛰어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요 인물
-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
-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 프로이센 수상, 독일 통일의 설계자
- 빌헬름 1세(Wilhelm I) – 프로이센 국왕
-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 프로이센 참모총장
- 파트리스 드 막마옹(Patrice de Mac-Mahon) – 프랑스 원수
- 프랑수아 아실 바젠(François Achille Bazaine) – 프랑스 원수, 메츠에서 포위됨
- 오귀스트 알렉상드르 뒤크로(Auguste-Alexandre Ducrot) – 프랑스 장군
- 에마뉘엘 펠릭스 드 뷔팡(Emmanuel Félix de Wimpffen) – 프랑스 장군
전개 과정
전투는 순식간에 프로이센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지휘 아래 몰트케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8월 4일 위센부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이틀 뒤 프뢰슈비예르-뵈르트 전투에서는 프랑스 중기병대가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공세 시작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상실한 상황이었습니다.
병중이던 나폴레옹 3세는 지휘권을 바젠 원수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8월 17~18일 그라블로트 전투(생프리바 전투)에서 패배한 바젠은 적군에게 포위된 메츠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막마옹 원수는 샬롱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출발했지만, 참모본부의 무능한 작전 지휘 탓에 8월 30일 보몽 전투에서 패배하여 요새 도시 세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월 1일,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부상을 입은 막마옹은 뒤크로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겼으나, 계급이 더 높다는 이유로 뷔팡 장군이 이를 거두는 등 프랑스 진영은 끝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병든 황제가 직접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습니다.
항복의 순간
다음 날인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요새 위에 백기를 게양하고 독일군 참모본부와 비스마르크 수상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항복 문서는 세단 고지대에 위치한 벨뷰 성에서 체결되었습니다. 패전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민들은 제정의 위신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깨달았고, 결국 9월 4일 제3공화국이 선포되며 제2제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헤센의 빌헬름스회에 성에 유폐되었다가 영국으로 망명해 아내와 합류했으며, 1873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편 파리는 포위 상태에 놓였고, 1871년 1월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그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결과와 영향
1870년 9월 2일 세단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 항복하면서 프랑스는 화약고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이 패배에서 비롯된 1871년 파리 코뮌의 민중 봉기는 제정 체제를 완전히 종식시켰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상실하는 굴욕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3공화국(1870~1940)은 약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속되며 근대 프랑스 정치 체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