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노예 무역의 시작과 확산
15세기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에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유럽 본국들은 설탕과 담배 플랜테이션에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흑인 노예를 적극적으로 동원했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 역시 식민지 확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삼각무역의 전성기
18세기 초, 소위 '삼각 무역'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노예 상인들은 유럽 연안에서 출발해 아프리카로 향하고, 그곳에서 노예들을 선적하여 식민지에서 되팔았습니다. 이후 배에는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실어 유럽 도시로 돌아와 판매함으로써 하나의 거래 고리를 완성했습니다.
노예 무역 폐지의 시작
흥미롭게도 노예 무역의 폐지는 노예제 자체의 폐지보다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나라마다 달랐지만, 1815년 빈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이 노예 무역 폐지에 합의하면서 노예제 완전 폐지로 가는 디딤돌이 마련되었습니다. 예컨대 영국은 1807년에 이미 노예 무역을 종식시켰지만, 정작 노예제 자체는 1833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
18세기~19세기
폐지의 과정
폐지운동의 이념적 배경
18세기 말 무렵, 폐지론자들은 노예들의 노동 및 생활 실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더 광범위한 이념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지식인 계층으로 확산되었고, 인간 존재의 보편성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관념 또한 노예제 문제를 재고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영국의 주도적 역할
식민지를 둘러싼 유럽에서는 무엇보다 영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787년부터 폐지론자들이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고, 청원서를 잇달아 제출하며 정치적 여론을 일으키는 가운데, 영국령 식민지에서 벌어진 수많은 노예 반란 역시 노예제 폐지의 명분을 키우는 데 일조했습니다. 영국은 국제적으로도 폐지 추진에 앞장섰습니다. 1815년 빈 회의에 노예 무역 폐지를 의제로 포함시키도록 강력히 주장한 것도 바로 영국이었으며, 1841년에는 최초의 노예제 반대 국제협약을 주관했습니다. 또한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는 반노예 진영인 북부를 지지했습니다.
프랑스의 노예제 폐지
프랑스는 1788년 유럽 최초의 폐지론 단체를 설립한 나라였습니다. 제1공화국은 산악파(몽타뉴파) 국민공회 치하에서 1794년 2월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이 결정을 철회하면서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제2공화국이 선포된 이후인 1848년 4월에야 노예제 폐지가 공식적으로 법령화되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는 스페인·포르투갈(1840년)과 함께 노예제를 가장 늦게 폐지한 유럽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계 노예 상인들은 19세기 내내 노예 무역을 계속 이어갔다는 점에서, 서류상의 폐지와 현실의 변화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습니다.
폐지의 결과와 의의
- 폐지 운동은 19세기 내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국제 사회는 1885년 2월의 베를린 협약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국제연맹 규약의 일부 조항에 이르기까지, 노예 제도를 규탄하고 규제하기 위해 공동으로 움직였습니다.
- 그러나 노예제라는 관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992년 국제노동기구(ILO)는 모리타니와 수단에서 여전히 노예제 상황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