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의 배경
1894년, 알자스 출신 유대계 프랑스군 참모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는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독일에 넘긴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본격적인 구명 운동을 벌이면서 진짜 배신자는 발생(Walsin Esterhazy) 소령으로 밝혀졌습니다. 군 정보국장 조르주 피카르(Georges Picquart) 중령 역시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드레퓌스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커지자 육군 참모부는 부득불 에스테라지를 군사법원에 회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스테라지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드레퓌스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채였습니다.
거대한 언론 캠페인이 벌어진 가운데 프랑스 사회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습니다. 드레퓌스파(Dreyfusards)는 이 장교의 무죄를 주장했고, 반드레퓌스파(Anti-Dreyfusards)는 그의 출신 배경 때문에 그야말로 '이상적인 희생양'이라며 그의 유죄를 믿었습니다.
에밀 졸라의 개입
드레퓌스가 당한 부정의에 분노한 에밀 졸라(Émile Zola)는 1897년 르 피가로(Le Figaro)에 이 사건과 관련된 세 편의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졸라의 적극적인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일부 독자들의 압박에 밀려, 그는 더 이상 이 신문에 글을 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898년 1월 13일
주요 인물
-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 발생 에스테라지 (Walsin Esterhazy)
- 조르주 피카르 (Georges Picquart)
- 에르네스트 보방 (Ernest Vaughan)
- 에밀 졸라 (Émile Zola)
경위
드레퓌스 사건을 접한 이후 에밀 졸라는 몇 달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룬 완성도 높은 기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를 실어줄 신문을 찾지 못하자, 그는 젊은 투쟁 성향의 신문 로오르(L'Aurore)의 기자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émenceau)에게 다가갔습니다. 졸라는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원고를 내밀었습니다. 제목이 너무 길고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를 원했던 로오르의 발행인 에르네스트 보방(Ernest Vaughan)은 제목 변경을 추진했습니다.
그리하여 클레망소가 선택한 제목이 바로 "J'accuse…(나는 고발한다…)"였습니다. 이 기사는 1898년 1월 13일 일간지 1면에 게재되었습니다. 필격적인 이 글에서 졸라는 드레퓌스가 겪은 부정의와 관련된 인물들과 책임자들을 하나하나 거론했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의 경위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자신이 감수하고 있는 위험을 잘 알고 있던 에밀 졸라는 1881년 언론법에 따라 공공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알프레드 드레퓌스 재판의 재심이 진행되기를 기다리며 런던으로 망명했습니다.
영향과 결과
- 이 기사의 게재로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에스테라지 소령의 무죄 판결로 위축되었던 드레퓌스파 진영에 새로운 활력이 불어넣어졌습니다. 지식인·작가·과학자들이 처음으로 탄원서 형식으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모았으며, 언론이 여론을 형성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 이후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두 번째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는 다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사면되었고, 마침내 1906년 무죄가 확정(복권)되었습니다. 한편 졸라는 이러한 입장 때문에 반드레퓌스파들의 표적이 되어 재산을 법원에 압류당했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입회도 좌절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