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퐁텐블로 칙령(1685), 낭트 칙령을 폐지하다

1598년 앙리 4세가 서명한 낭트 칙령은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며 프랑스를 관용의 길로 이끌었고, 종교전쟁의 종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루이 13세 시대에 베아르 지역의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신앙 허용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1622년부터 루이 13세와 리슐리에는 네그르펠리스, 라로셸, 몽토방 등지에서 무력으로 종교 분쟁을 진압했습니다. 이어 1629년 '종교개혁의 요새'라 불리던 프리바가 함락되어 약 1,5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알레 칙령(1629)의 체결로 개신교도의 특권은 축소되었습니다. 요새 해체와 집회 금지 등의 조치가 취해졌지만, 개신교도의 예배 자유와 가톨릭 교도와의 평화는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퐁텐블로 칙령(1685), 낭트 칙령을 폐지하다

배경: 관용에서 탄압으로

루이 13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무력으로 백성의 신앙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 루이 14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을 자신의 종교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태양왕에게 관용 정책을 진언하던 현명한 참모 콜베르가 사망하면서 루이 14세는 정책 결정에 더욱 자유로워졌습니다. 고해신부 라셰즈 신부의 지원 속에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한 그는 개종을 강력하게 장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정책은 점차 경화되며 구체적인 조치로 이어졌습니다. 개신교도들은 자유직업 분야의 직책을 잃고 공직에서 배제되었으며, 개신교도와 가톨릭 교도가 절반씩 구성된 혼합 재판소는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나아가 국가는 용기병이 동원된 실질적인 탄압, 이른바 '드라고나드(dragonnades)'를 조직했는데, 이는 루부아 장관과 마리약 총독의 강력한 지원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1685년 10월 18일, 낭트 칙령 폐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망명하거나 강제 개종을 당했습니다. 대규모 배교 선언이 이어지자 루이 14세는 프랑스 내 개신교가 사실상 소멸했다고 판단했고, 할아버지 앙리 4세가 서명한 낭트 칙령을 폐지할 명분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1685년 10월 18일,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 드 루부아 후작이 작성한 퐁텐블로 칙령과 함께 낭트 칙령의 폐지가 서명되었습니다. 이로써 알자스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개신교 신앙이 금지되었고, 가톨릭 중심의 종교적 통일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 예배당은 파괴되고 개신교 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평신도의 망명은 금지되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왕국을 떠났습니다.

주요 인물

  • 루이 14세(Louis XIV)
  • 르네 드 마리약(René de Marillac)
  •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 드 루부아 후작(François Michel Le Tellier, Marquis de Louvois)

결과와 영향

이 칙령은 금지에도 불구하고 약 20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 집단의 대이주를 초래했습니다. 그들은 숙련된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변국인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잉글랜드, 스위스, 브란덴부르크 등의 경제·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낭트 칙령의 폐지는 이미 폭군으로 여겨지던 루이 14세에 대한 유럽 각국의 경계심을 한층 더 강화시켰고, 이들은 점차 프랑스에 맞선 제2차 대동맹을 결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