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영광의 사흘(Trois Glorieuses)과 7월 왕정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파리에서는 '영광의 사흘(Trois Glorieuses)'로 불리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절대왕정으로의 회귀를 추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던 반자유주의 군주 샤를 10세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샤를 10세가 퇴위한 뒤 '시민왕'이라 불린 루이 필리프 1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되면서 7월 왕정이 수립되었습니다.
복고왕정기 이후 프랑스 사회에 희망을 안겨준 이 혁명을 통해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보다 민주적인 정치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카뉘(Canuts)는 누구인가?
카뉘는 한 대 이상의 직기를 소유한 숙련 장인 직공들을 가리키며, 비단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리옹은 유럽에서 같은 산업 분야 노동자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였습니다. 반란 발생 당시 리옹에는 약 8,000명의 카뉘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작업장에서 약 20,000명의 동료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위기
비단 산업은 1827년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었습니다. 카뉘들은 '상인 제조업자'라 불리는 사실상의 무역상들로부터 원자재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상인들이 완제품을 되사들이는 가격, 즉 상인이 공급한 원자재에 대한 작업 대가인 임금이 계속 하락하면서 카뉘와 노동자들의 생계는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반란의 전개 과정
1831년 반란
10월 8일, 리옹 크루아루스(Croix-Rousse) 지역에 약 300명의 카뉘이 모여 취급 가격 인상을 요구했습니다. 10월 내내 파업 참가자는 계속 늘어났고, 현지 총독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작업장 관리인들과 상인들을 소집하여 제조 가격에 대한 타협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양측이 합의에 도달했음에도 상인들은 새로운 합의의 이행을 거부했습니다.
1831년 11월 21일, 카뉘와 노동자들은 리옹 프롤레타리아트 일부의 호응까지 받아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크루아루스에서 폭동이 시작되었고, 수천 명의 반군은 시청을 점거했습니다.
반란군이 운동의 방향을 놓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던 사이, 질서 회복을 위해 30,000명의 병력이 리옹에 진입했습니다. 총독은 교체되었고, 파업 참가자들에게는 가벼운 진압만이 가해져 재판 끝에 수감된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1834년 반란
1834년 2월 14일, 하락한 가격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제조업자들이 도시를 떠나긴 했지만, 정부 당국은 1831년보다 훨씬 강경한 입장에 섰습니다. 운동이 종결된 지 몇 달 뒤 재판이 열렸는데, 4월 9일 한 건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약 3,000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4월 9일부터 14일 사이 리옹 시내와 교외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졌으나, 군대는 즉각 출동하여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300명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결과
- 노동계급 운동의 서막: 1831년 반란은 프랑스 최초의 노동계급 운동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파업 자체는 당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정체성 형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반란 직전에 창간된 신문 L'Écho de la Fabrique(라 파브리크의 메아리)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정치적 주장으로 확대된 1834년 반란: 1834년 반란은 1831년보다 더욱 적극적인 정치 운동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다른 직종의 사람들과 다시 연합한 카뉘들은 단순한 임금 요구를 넘어 군주제에 맞서고 공화제 선포를 지향하는 더 큰 정치적 프로젝트를 추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