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의 배경: 축적된 사회적 위기
러시아의 사회적 위기는 오랜 기간 축적되어 왔습니다. 나라는 이미 1905년 한 차례 혁명을 경험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농촌 인구의 약 85%가 기근에 시달렸고, 관료제와 군부의 독재 아래 발전이 더딘 가운데 황실은 부패 의혹이 제기되던 라스푸틴(Rasputin)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1905년 이후 러시아는 주요 산업국으로 성장했지만, 자본의 대부분은 외국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빠르게 성장한 반면 생활고에 허덕이는 노동자 수도 급증하면서 뚜렷한 사회적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차르에 맞선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둘이었는데, 멘셰비키(Mensheviks)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볼셰비키(Bolsheviks)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추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런 긴장을 극한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전쟁은 러시아에게 잔혹했으며, 1915년 한 해에만 90만 명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제국은 더 이상 군대를 지원할 수 없었고, 기근과 급격한 물가 상승 속에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주요 인물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차르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 볼셰비키당의 지도자
- 레온 트로츠키: 혁명의 핵심 지도자, 영구혁명론의 주창자
- 요시프 스탈린: 볼셰비키 간부, 훗날 소련의 지도자
혁명의 전개 과정
2월 혁명 (1917년)
1916년에서 191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특히 추웠고, 경제 상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12월 31일 라스푸틴이 암살되고 부르주아지는 차르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볼셰비키당은 1917년 1월 21일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규모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차르는 두마(의회)를 해산했고, 볼셰비키는 국민통합 운동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3월이 되어 식량 배급이 시작되자 제국 전역에서 파업이 확산되었고, 군대마저 이를 억누르기 어려웠습니다. 3월 12일, 군대의 일부가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무려 4만 명의 시위대가 무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멘셰비키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결성했고, 볼셰비키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함께 새 정부를 구성했지만, 볼셰비키는 여전히 의심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차르는 3월 15일 퇴위했고, 소비에트가 두마에 진입하면서 민주적 자유가 회복되었습니다.
2월 혁명 이후, 10월 혁명 전야까지
두마에서는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새 정부를 마지못해 지원했습니다. 그들 눈에 이 정부는 부르주아지가 독점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917년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정부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라의 모든 기관을 통제하며 모든 토지와 기업을 국유화하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4월 테제는 처음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1917년 5월 초 임시정부가 전쟁 지속을 선언하자 대규모 민중 시위가 벌어졌고, 전쟁 종결을 요구하는 볼셰비키에게 민심이 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위기를 거쳐 더 온건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볼셰비키당은 레닌의 테제에 뜻을 모으고 "빵, 토지, 평화"라는 슬로건 아래 저항을 강화했습니다.
7월 3일과 4일, 전선 상황이 악화되자 크론슈타트에서 대규모 볼셰비키 봉기가 일어났으나 군대에 의해 힘겹게 진압되었습니다. 정부는 더욱 보수적으로 변했고, 볼셰비키에 맞서 결집했습니다. 볼셰비키는 민주적 방법으로는 더 이상 권력을 잡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혁명을 조직하기로 결심합니다.
8월 27일, 구체제의 보수파인 콘닐로프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볼셰비키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경제는 계속 악화되었고,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며 사회 상황은 점점 폭력적으로 치달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불과 20만 명의 당원을 둔 볼셰비키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10월 혁명
1917년 9월에서 10월 사이,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를 설득하여 새 체제를 구성할 준비의회를 지원하지 말고 혁명 단계에 돌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은 조금씩 혁명을 준비해 갔습니다.
10월 9일,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혁명군사위원회(CMR)를 창설하고 직접 수장이 되었으며, 10월 16일 당은 봉기를 결의했습니다.
11월 4일(구 러시아력 10월 22일), 군대가 혁명군사위원회에 합류했습니다.
11월 6일(10월 24일), 반혁명 세력이 페트로그라드의 겨울궁전 주변에 집결했습니다.
11월 6일 밤부터 7일(10월 24일~25일) 사이, 레닌이 이끄는 혁명군사위원회가 도시를 장악했고, 볼셰비키 소속 순양함 '오로라호(Aurora)'가 겨울궁전 포격을 예고했습니다.
11월 8일(10월 26일), 오로라호가 궁전을 포격했고 소비에트가 회합하여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준비의회는 해산되었으며, 소수파였던 멘셰비키들은 야유를 받았습니다. 혁명으로 인한 사망자는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혁명의 결과
- 11월 8일(10월 26일), 레닌이 이끄는 권력 기구인 인민위원평의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이들은 전쟁 종결을 첫 번째 과제로 삼고 토지 집단화를 추진했습니다.
- 러시아는 내전에 돌입하여 보수파인 백군(White Army)과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 레닌은 실질적인 당 독재 체제 속에서 권력의 중심 인물로 군림했습니다.
- 10월 혁명 초기부터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스탈린의 '단계별 혁명론'이라는 두 노선이 대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