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최정예 강습부대 '아르디티'의 탄생과 몰락

이탈리아 육군의 정예부대 중 하나인 콜 모스킨 제9낙하산 강습연대(9º Reggimento d'Assalto Paracadutisti Col Moschin)는 흔히 '아르디티 인쿠르소리(Arditi incursori)', 즉 "용맹한 기습자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별명은 부대의 작전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역사적 유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창설된 강습 부대, 바로 '아르디티(Arditi)'가 그 시초다.

참호전이 만든 교착 상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14년 말부터 각 전선은 점차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공세 작전이 중단되면서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등 양측이 마주한 국경 지대는 참호, 방벽, 철조망으로 이어진 수십 킬로미터의 방어선으로 뒤덮였고, 어느 쪽도 이를 돌파하지 못했다. 포격도, 1915년의 독가스 공격도, 이듬해 등장했지만 아직 너무 미숙했던 초기 전차조차 이러한 진지전의 교착을 깨지 못했으며, 끔찍한 위생 환경 탓에 질병으로 인한 막대한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규모 보병 돌격은 기관총 앞에서 쉬운 먹잇감이 될 뿐 실패로 돌아갔고, 1917년 이탈리아 왕립육군(Regio Esercito)은 '레파르티 다살토(Reparti d'Assalto)', 즉 강습 부대 조직에 나섰다. 이들은 특정 지점을 공략해 주력 보병이 진격할 길을 여는 임무를 맡았다. 각 연대에서 가장 용맹한 병사들을 선발했기에 이 부대는 스스로 '아르디티'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 기원은 1914년부터 적진 후방에서 코만도처럼 활동하던 소규모 선례 부대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들은 주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최정예 강습부대  아르디티 의 탄생과 몰락

아르디티 창설에 영향을 준 또 다른 부대는 '죽음의 중대'였다. 이들은 대규모 돌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가위로 철조망을 절단하거나 폭파해 전장을 개척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각 연대마다 형태는 달랐지만, 이 중대들은 독립 부대임을 드러내는 특유의 군복을 지녔다. 어느 쪽이든 그 정신은 분명했다. 적 참호를 공격해 길을 열고,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실제로 독일군에도 같은 개념의 '슈투스트루펜(Stosstruppen)'이 있었는데, 이 역시 하나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승리 아니면 모두 몰사", 30%의 사상자율

Or la vittoria, o tutti accoppati. "승리하거나, 아니면 우리 모두 죽거나." 이것이 아르디티의 좌우명이었다. 현실에 매우 충실한 구호였는데, 그들이 기록한 사상자 비율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웃도는 무려 30%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행해야 했던 전투 방식이 낳은 결과였다. 아르디티는 종종 소총 대신 테브노 수류탄과 '파이어크래커'(참호 안에 던지기에 적합한 저위력 수류탄)에 의존해야 했다. 여기에 권총과 간단한 단검을 곁들였는데, 수류탄은 적에게 던져 대다수를 제거하는 데 쓰이고, 권총과 단검은 참호라는 좁은 공간에서 생존자들과 벌이게 될 백병전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탄 흉갑을 착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임무의 특수성 때문에 그들은 강도와 다양성 면에서 모두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호신술, 단검을 활용한 백병전, 수류탄 사용법을 익혔으며, 다른 무기 훈련도 병행했다. 사실 대부분의 아르디티는 선발 이전부터 이미 우수한 병사들이었다. 심리 검사를 통과해야 했을 뿐 아니라, 대개 신속한 기동에 강건한 체력과 지구력이 요구되는 베르살리에리(Bersaglieri)나 알피니(Alpini) 같은 부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군복에도 양 부대의 요소가 녹아 있었다. 부대마다 색이 다른 화염 문양의 부대 마크, 사보이 왕가의 전통적인 매듭 문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을 상징하는 'VE' 자수 등이 그것으로, 과거 용맹 훈장에서 유래한 상징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색색의 페즈 모자를 쓰고 있다가 전투 시에는 헬멧으로 교체한다는 점이었다.

정식 창설과 첫 전투

고위 지휘부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아르디티는 1917년 중반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주세페 바시(Giuseppe Bassi) 대령이 지휘하는 제8군단 예하 제48사단에 통합되었으며, 바시는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그라치올리(Francesco Saverio Grazioli) 장군의 결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각 부대는 13명의 장교 지휘 아래 약 400명의 자원병으로 구성되어, 총 1만 8천 명의 병력을 이루었다. 초기 기지는 이탈리아 우디네 현의 마을 스드리카 디 만차노(Sdricca di Manzano)에 위치했으며(오늘날에도 매년 여름 이곳에서 기념 행사가 열린다), 전과 없는 자는 받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아르디티는 누리는 특권 때문에 다른 병사들에게 좋은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최정예 강습부대  아르디티 의 탄생과 몰락

그들의 첫 전투가 정확히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날짜를 대략적으로 짚어보면, 크리스토포로 바세조(Cristoforo Baseggio) 대위가 이끄는 자원정찰중대(Compagnia volontari esploratori)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중대는 1916년 4월 몬테 오스발도 공격에서 궤멸되었고 한 달 뒤 해산되었다. 바세조가 아르디티의 창시자로 지칭되기도 하지만, 당시 아르디티 본인들이 이를 부인했으므로 그를 아르디티를 만든 수많은 인물 중 한 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기준 연도는 1917년이다. 구체적으로 5월 14일 바시의 병력이 몬테 산 마르코를 강습한 것이 부대 창설의 청신호가 되었고, 8월 18일 몬테 프라타에서 정식으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두 개 중대가 이손초 강을 기습 도하해 5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3주 후에는 세 개 중대가 몬테 산 가브리엘레에서 오스트리아군 3천 명과 포 28문을 추가로 포획하며 위업을 이어갔다.

피아베의 카이만

그해 가을 그들은 유명한 카포레토 전투(이 참패로 바시는 카펠로 장군으로 교체되었다)에 참전했고, 정확히 1년 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도 싸웠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활약은 1918년 여름 피아베 전투에서 펼쳐졌다. 피아베 강을 따라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카포레토의 패배 이후 이탈리아를 위협하던 침공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승리로 끝났다. 아르디티는 적진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을 감행했고, 강을 헤엄쳐 건너가 적군을 베어 죽이며 '카이마니 델 피아베(Caimani del Piave)', 즉 '피아베의 카이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의 COMSUBIN(이탈리아 해군 수중·기습 부대 사령부)이 그들을 기리기 위해 이 파충류를 엠블럼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전 이후: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

1920년, 전쟁이 끝나고 존재 이유를 잃은 아르디티는 동원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징물은 무솔리니 정권과, 스스로를 반(反)파시스트 민병대라 칭한 '아르디티 델 포폴로(Arditi del Popolo)' 양측 모두에게 채택되었다. 양 진영 모두 병사들이 내걸었던, 이빨 사이에 단검을 문 해골을 상징으로 삼았다. 한편 많은 참전 용사들은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민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지식인 출신 전직 아르디티인 마리오 카를리(Mario Carli) 대위가 이끄는 ANAI(이탈리아 국민 아르디티 협회)에 합류했다. 카를리는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가 크로아티아 도시 피우메에서 이탈리아와 연계된 자유국가 건설을 추진하던 운동을 지지했다. 단눈치오는 스스로를 '두체(Duce)'라 칭했고 '아르디티'라 이름 붙인 민병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 추종자들은 검은 셔츠(훗날 무솔리니가 모방했다)와 같은 색의 페즈 모자를 착용했다.

1921년 카를리는 초기 파시즘에서 물러나, 앞서 언급한 급진 좌파·공화주의 성향의 단체 '아르디티 델 포폴로' 창설에 동참했다. 그는 거리에서 파시스트들과 자주 충돌하며 "아 노이!(A noi!, 우리를 위하여!)"를 외쳤다. 1922년 파르마에서 벌어진 충돌이 가장 격렬했는데, 양측에서 수백 명이 참여해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같은 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아르디티 델 포폴로는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그 무렵 카를리는 이미 그들을 떠나 다시 파시즘 품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최정예 강습부대  아르디티 의 탄생과 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