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중세의 성유물: 신앙과 권력을 움직인 신성한 거래

중세의 성유물: 신앙과 권력을 움직인 신성한 거래

13세기 생루이가 수집한 성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파리에 세운 생트샤펠, 후진(choir)의 전경 • ISTOCK

성유물(聖遺物)은 라틴어 reliqua, 즉 '남겨진 것'에서 유래한 말로, 그리스도나 성인과 연관된 모든 유존물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유해만이 아니라 성인이 생전에 소유했거나 사용했던 물건, 죽음 전후로 몸에 닿았던 모든 물체가 포함된다.

성유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엄밀한 의미의 실체적 성유물, 즉 성인의 신체 일부다. 둘째는 비실체적 성유물로, 성인이 일상에서 쓴 물건이나 참회·고형에 사용된 도구가 해당한다. 셋째는 대표적 성유물로, 성인의 유골이나 무덤에 접촉시킨 물건(예: 덩굴)을 말한다. 12세기 말에는 '성 토머스의 물', 이른바 '캔터베리 물'이 유행했다. 1170년 암살당한 잉글랜드 대주교 토머스 베켓의 피 한 방울을 물에 희석해 만든 것으로, 작은 병에 담아 귀하게 보관했으며, 아픈 부위에 발르거나 마시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영적 보호의 방패

기독교 초창기부터 서방의 신자들은 성모, 그리스도, 성인의 성유물이나 상(像)을 공경해 왔다. 집에 두는 작은 나무 판 위의 간단한 그림조차 신성의 흔적이자 신앙을 돕는 물질적 매개, 마음을 지탱해 주는 안식처였다.

중세 초기의 주교는 도시의 수호자(defensor civitatis)로서 성벽을 잘 관리하는 동시에, 성인의 성유물을 모신 성소를 도시 주변에 늘려 시민을 보호해야 했다. 이렇게 왕관처럼 둘러선 성소들은 하나의 영적 방벽을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것이 석벽보다 더 확실한 방어라고 여겼다. 10세기 말 힐데스하임의 주교 베른바르트는 감시탑을 갖춘 성벽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하사한 성십자가 성유물을 모실 예배당을 세워 바이킹의 침입을 막아냈다.

역병, 가뭄, 홍수, 기근, 전쟁 같은 위기가 닥치거나 풍작과 은총을 비올 때, 도시든 농촌이든 공동체는 성유물에 의지했다.

성유물이 수행한 사회적 기능도 다양했다. 중세에 맹세하는 모든 이는 성경이나 성유물 위에서 서약했다. 서방 전역의 주요 전례 축일에는 각 교회의 성물함(랄리쿠아리)에서 성유물을 꺼내, 공식적이고 정교하게 규정된 행진 경로를 따라 운반하고 대성당 앞에 전시했다. 신자들은 성물함 아래를 오가며 기도하고 성인에게 호소했으며, 성물함에 뚫린 작은 구멍(오쿨루스)을 통해 성유물을 보고 때로는 직접 만질 수도 있었다.

위신의 대가

성유물의 소유는 막대한 위신의 원천이었고, 신자들의 헌금을 불러모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교회와 수도원, 군주들이 명망 높은 성유물 획득에 열을 올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926년경 게르만 왕 하인리히 1세는 상부 부르군트의 루돌프 2세로부터, 예수의 수난에 쓴 못이 박혀 있다는 성창(聖槍)을 받았다. 이 성유물은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보배(레갈리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1239년부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생루이)는 예수가 수난 당시 썼던 성가시관, 진십자가 두 조각, 그리스도의 피, 성묘의 돌, 옆구리를 찌른 창의 쇠붙이, 고통의 순간 건네진 스펀지, 성수의(聖屍衣) 조각, 세례 요한의 머리까지 차례로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성유물을 보호하고 공경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은 파리 한복판에 생트샤펠을 짓기 시작했고, 이 건축물은 1248년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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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물은 순례길의 좌표이기도 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 순례자들은 사도의 성유물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길 도중에는 오비에도 같은 곳에 들러 십자가의 성못, 성수의 조각, 카나의 혼인잔치에 남은 여섯 개의 포도주 항아리 가운데 하나를 앞에 두고 묵상하기도 했다.

성유물 숭배는 10~11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점차 교회는 성유물의 매매와 절도, 사인(私人)의 소유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많은 신학자에게 성유물은 sacra res, 즉 '신성한 것'이므로 개인이나 평신도가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카타리파처럼 신성의 물질화로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이단'의 도전도 이어졌다. 1215년 라테란 제4차 공의회는 새 성유물의 공경에 교황의 사전 승인을 필수로 정하고, 성물함 밖으로 꺼내 전시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성물함에서 꺼내는 순간이 위조품을 낳을 빌미가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1317년에는 교황 요한 22세가 모든 성물함을 신성한 장소에 안치하도록 명령했다. 마침내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성유물 숭배는 개신교 진영의 격한 비난과 조롱의 표적이 되었는데, 1543년에 쓴 칼뱅의 성유물론(Traité des reliques)이 그 단적인 증거다.

더 알아보기
• E. Bozóky, Saint Louis et la politique des reliques de Constantin(생루이와 콘스탄티누스 계열 성유물 정책), Beauchesne, 2007.
• N. Herrmann-Mascard, Les reliques des saints. Formation coutumière d'un droit(성인의 성유물: 관습법의 형성), Klincksieck, 2000.
• P.J. Geary, Furta sacra. Le vol des reliques au Moyen Âge(푸르타 사크라: 중세의 성유물 절도), Aubier, 1993.

연표
335년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 위에 성묘 교회가 봉헌되다.
829년
전승에 따라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다는 자리에 알폰소 2세가 교회를 세우다.
1354년
성수의(그리스도의 무덤 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등장하다. 1578년부터 토리노에 보관되다.
1550–1598년
펠리페 2세가 새 에스코리알 궁전을 위해 7,000점이 넘는 성유물 컬렉션을 모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