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태양왕 루이 14세에 맞선 바르바리 해적들

태양왕 루이 14세에 맞선 바르바리 해적들

19세기 판화로, 바다에서 바라본 알제 시내의 모습. • ISTOCK

알제 섭정정의 권력을 쥔 자니사리(근위병)와 해적 선장들로 구성된 '무적 민병대'는 유럽 정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유년기인 1643~1653년 섭정기 동안 알제는 스페인과의 끝없는 전쟁으로 약해진 프랑스를 하찮게 여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알제는 프랑스의 경쟁국들이 던진 제안에 귀 기울여 1680년에는 네덜란드와, 1682년에는 영국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했다. 두 경우 모두 루이 14세는 이 섭정정을 엄중히 징벌할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300문의 대포가 알제를 향하다

1664년, 루이 14세는 사촌이자 앙리 4세의 손자인 프랑수아 드 부르봉-방돔, 곧 보퍼 공작에게 해적들의 주요 해상 거점인 지젤리(현 지젤) 점령을 명했다. 이 작전이 성급하게 끝나자 다음 해 그는 알제 섭정정 연안으로 다시 출정시켰는데, 이때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립해군 대위로 발탁했던 전직 해적 장 폴 드 소뫼르, 이른바 '폴 기사(Chevalier Paul)'가 그를 보좌했다. 1665년 8월, 보퍼 공작과 폴 기사의 함대는 셰르셸 앞바다에서 오스만 분함대를 불태웠고, 특히 술탄의 기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승리에 만족하지 않은 폴 기사는 곧장 라굴레트로 몰아가 신규 해적선 3척을 나포했으며, 그중 2척을 불태워 버렸다. 알제는 강화를 탄원했고 1666년 5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알제 섭정정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던 1,100명이 넘는 프랑스인 노예를, 약속했으면서도 풀어주기를 즉각 거부해 버렸다.

그리하여 17세기 말, 알제의 성공 사례는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고, 다른 섭정정의 해적들도 지중해에서 약탈을 거듭했다. 루이 14세는 적의 근거지에서 직접 후려치기로 결심했다. 1680년 아브라앙 뒤크네(Abraham Duquesne)를 해군 중장으로 임명해 알제·튀니스·트리폴리 세 섭정정에 최후통첩을 전달하게 한 것이다. 1681년 6월, 40문 이상의 포를 장착한 7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진 분함대를 이끌고 뒤크네는 알제와 튀니스에 국왕의 의사를 통보했다. 이어 오스만 술탄의 중립을 확인한 뒤에는 트리폴리 해적들이 잠복해 있던 키오스 섬으로 향했다. 7월 23일, 항구에 대한 집중 포격 끝에 트리폴리 사략선 8척 중 6척을 격침시켰다. 놀란 '지고의 문'(오스만 정부)은 이 섭정정에게 1681년 10월 강화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두렵지 않음을 과시하려던 알제는 오히려 공세에 나섰다.

1683년 7월 27일, 한 차례의 포격에 대한 보복으로 라자리스트회의 장 르 바셰 신부는 대포구에 묶였고, 포성과 함께 그의 처참한 유해가 프랑스 함대 위로 흩날렸다.

그 결과 1682년 7월, 프랑스 함대는 알제만에 닻을 내리고 사흘 밤 동안 도시를 포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해적들을 겁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살기를 돋우는 결과를 낳았다. 뒤크네는 1683년 6월 다시 돌아와 도시를 재차 포격했다. 알제의 데이(총독)가 강화에 서명할 준비를 마쳤을 무렵, 그는 해적 조합의 우두머리 메조모르토(Mezzomorto)에게 암살당했고, 권력을 찬탈한 메조모르토는 가차 없는 항쟁을 명령했다. 1,000채가 넘는 가옥을 파괴하고 시체를 실어 나르는 데 배 12척이나 필요했던 그 포격에 대한 응답으로, 1683년 7월 27일 교황 특사 대리인이며 라자리스트회 신부인 장 르 바셰(Jean Le Vacher)는 대포구에 묶였고, 발사된 화망은 그의 육신을 프랑스 함대 위로 흩뿌렸다. 새로운 포격에도, 굶주림에 몰린 알제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협상 테이블 위의 폭탄

루이 14세는 뒤크네를 튀르빌(Tourville)로 교체했다. 아프리카 통상권 총관 데니 뒤조(Denis Dusault)라는 능숙한 협상가의 도움으로 1684년 4월 조약이 체결되었다. '무적 민병대'가 처음으로 폭탄의 논리 앞에 고개를 숙인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이번 징벌이 바르바리 세계 전체에 본보기가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트리폴리는 1682년 강화 직후부터 이미 해적 행위를 재개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부제독 데스트레 원수에게 1685년 6월 22일 이 도시를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달 29일, 트리폴리는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데스트레는 이어 내전으로 분열된 튀니스 섭정정 앞에 나타나, 9월에는 양대 세력으로부터 프랑스 통상권의 갱신을 이끌어냈다.

1688년 7월 1일부터 16일까지, 1만 발의 폭탄 세례가 알제의 부유한 해적들의 기념물과 저택을 유린했다.

그러나 알제의 분위기는 남다르았다. 해적들은 평화가 강요한 무위—곧 그들에게 몰락을 의미하는—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데이 메조모르토의 묵인 아래 그들은 1684년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깼다. 이에 베르사유는 1686년과 1687년 징벌 원정을 재개했다. 데이의 대응은 신속했다. 영사부터 선장까지 모든 프랑스인을 사슬에 묶어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다. 제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1688년 7월 1일부터 16일까지 쏟아진 1만 발의 폭탄은 부유한 해적들의 기념물과 저택을 파괴했다. 앙드레 피올(André Piolle) 영사는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고, 다른 프랑스인들도 차례로 총격을 받았다. 그때마다 데스트레 제독은 즉시 뗏목 위에서 오스만인이나 무어인 한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7월 18일, 영국 명예혁명이 촉발한 유럽 정세 변화로 제독은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알제는 자신이 진정 무적이라는 확신에 빠졌다. 1689년 프랑스는 협상 재개를 결정하고 재능 있는 인물, 기욤 마르셀(Guillaume Marcel) 대위에게 이를 맡겼다. 협상은 데이 메조모르토의 금전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었지만, 1689년 9월 조약이 서명되자마자 해적들과 자니사리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며 데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데이는 간신히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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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부터 1689년까지 알제와의 전쟁은 루이 14세 치세 중 대륙에서 가장 오래 평화가 지속된 시기에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요구한 막대한 재정 부담과 전쟁의 강도, 지속 기간을 고려하면 프랑스 왕국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마르세유 상인들은 불필요하게 비용이 드는 호전적 무력 시위가 경제 활동을 방해한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1690년, 베르사유와 알제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와 알제 섭정정 사이의 평화는 어느 쪽도 상대의 성실성을 믿지 못하는, 때때로 갱신될 뿐인 휴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호 불신 탓에 1830년 프랑스가 알제를 정복하기 전까지, 알제 해적들은 지중해에서 프랑스에게 계속 골칫거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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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Barbaresques(The Barbarians), J. Heers, Perrin(Tempu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