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해를 지배한 기독교 왕국, 악숨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 고원지대, 홍해 서안 인근에 자리 잡은 악숨 왕국은 기원후 1세기부터 지중해 지역과 인도양을 잇는 대상로 무역의 핵심 교역 상대로 부상했습니다.
4세기경 이 에티오피아 국가의 통치자는 해안을 드나들던 상인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에티오피아 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에 편입되었고, 이집트 수도승들 가운데서 서임된 대주교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토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한편, 그동안 군주들의 권력과 사후 업적을 기념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던 오벨리스크(방첨탑)들은 점차 버려지게 됩니다.
6세기에 이르러 악숨 왕국은 절정기를 맞습니다. 이웃 예멘의 힘야르 왕국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고 에티오피아 출신 부왕을 세울 수 있었을 만큼 강대한 세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슬람의 부상과 쇠퇴의 시작
그러나 이슬람의 발전과 아랍인들의 정복 사업으로 홍해 무역 독점권을 상실하면서 기독교 왕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습니다. 약탈의 첫 번째 희생자는 바로 악숨 도시 자신이었습니다. 세 조각으로 부러져 누워 있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7세기 도굴꾼들이 기초를 파내면서 무너진 것입니다.
7세기와 8세기 초, 악숨 군대는 슈아이바와 지다 항구 방면으로 몇 차례 공세를 펼쳤습니다. 홍해에서의 포위망을 풀려는 왕국의 마지못한 노력이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에티오피아 역사는 기록이 극히 드문 암흑기로 접어듭니다. 일부 비문과 10세기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 단편만으로 미루어 볼 때, 한 여왕이 이끈 반란이 악숨 왕국을 타격하여 기독교 국왕의 암살과 교회 파괴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부터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는 기독교화와 이슬람화가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때로는 공생 관계였고, 정치·경제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때로는 격렬히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무슬림 공동체는 다시 일어선 기독교 왕국과 교역하기 위해 고원지대에 정착해 나갔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은 묘비석뿐입니다. 이 유물들은 홍해 연안 지역 출신 상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달라크 제도, 수단 동부 사막의 금과 에메랄드 광산 지대, 아라비아반도 각지 출신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카디(이슬람 법관)가 사법을 담당하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술탄국들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기독교 왕국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따라 자리 잡았습니다.
이집트의 궤도 속에서
같은 시기, 혼란의 시기를 거친 뒤 기독교 세력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와 다시 연결을 회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10세기에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연결이 끊긴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집트는 파티마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고,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재상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양측 모두 에티오피아 땅에 있는 같은 신앙의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균형이 점차 구축되었습니다. 총대주교는 대주교를 동반한 사절단을 기독교 국왕에게 정기적으로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국왕은 선물과 함께, 자신의 영토 내 무슬림 상인들의 안전과 모스크 건설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이집트 세력에 보내야 했습니다.
한편 기독교 국왕은 이집트에서 콥트 신자들이 박해받으면 자신의 왕국 내 무슬림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위협은 실제로 실행되기도 했습니다. 12세기 어느 에티오피아 국왕은 왕국 북부의 무슬림 상인 공동체를 상대로 실질적인 정복 전쟁을 벌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민 전체를 포로로 잡아, 자신이 세운 교회의 토지에서 일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고원지대의 자원(금, 상아, 노예)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기독교 세력과, 고원지대와 해안 사이의 운송로를 장악한 무슬림 세력 간의 경제적 공생에 기반한 상대적 평화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게임 속에서 두 세계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장터 도시들을 통해 교류했습니다. 기독교 왕국과 무슬림 술탄국 간의 동맹은 혼인으로 공고해졌고, 14세기부터 술탄국들은 점차 기독교 국가에 종속되어 갔으며, 네구스(황제)는 심지어 술탄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정기적으로 개입했습니다.
간헐적인 충돌은 이러한 관계가 늘 협상의 대상이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16세기 초, 상황이 급변합니다. 수십 년간의 기독교 감호 끝에, 한 술탄국 내부에서 이 체제와의 결별을 원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술탄 왕조와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가지(Ahmed ibn Ibrahim al-Ghazi)를 구세주로 삼아 이맘으로 추대합니다. 그는 혼성군 조직에 성공했고, 1531년부터 먼저 기독교 왕국의 영향권에 들어간 무슬림 영토를 탈환한 뒤 기독교 왕국 정복에 나섰습니다. 네구스와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분견대의 지원으로 세력 균형이 바뀔 때까지 도피를 강요당했고, 1543년 이맘이 사망하자 기독교군은 지하드로 상실한 영토를 마침내 탈환했습니다. 이로써 이 전쟁으로 깊이 변모한 기독교 왕국의 재건이 시작됩니다.
더 읽을거리
11~13세기 에티오피아 기독교 왕국, 성스러우면서도 찬탈한 왕조의 수수께끼(Marie-Laure Derat, Brepols, 2018)
기독교와 이슬람 이전의 신앙들
기독교화 이전 악숨 왕국에서 행해지던 종교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뱀 숭배, 대지와 별의 신들, 하늘의 주님 숭배 등은 근동 지역과 유사한 종교 분위기 속에 깊은 토착적 요소가 공존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신앙 체계가 함께 존재했을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믿음들은 기독교화와 이슬람화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고원지대 곳곳에서는 11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분들이 발견됩니다. 이들은 기독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장례 관행을 증언하지만, 과연 어떤 숭배에 귀속시켜야 할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입니다. 또한 14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에티오피아 기독교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 언급됩니다. 토지 상속권이 없다는 이유로 멸칭인 팔라샤('추방자들')로 불린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좋은 직업에서 배제되고 변방 지역으로 밀려났으며, 이들 다수는 20세기에 이스라엘로 이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