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교황'은 로마 주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초기 교회의 숨은 역사

 교황 은 로마 주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초기 교회의 숨은 역사

초기 로마의 주교들에 대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미사 경문에 새겨진 이름들, 성벽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 이어진 초상화 연작, 그리고 카타콤바 속 '교황들의 지하 묘소'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기억은 사실 시기적으로 늦게 형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후대의 창작에 가깝습니다. 검증 가능한 역사는 2세기 중반에서야 비로소 시작됩니다.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던 초기 교회의 리더십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직분 자체가 로마에서 오랫동안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160년경에는 '주례자(프레시데스)'가 성찬을 집전하고 공동체의 사회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성찬이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며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나누는 의식을 말합니다. 한편 '주교(bishop)'라는 칭호가 비문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236년부터였습니다.

250년 무렵에 이르러서야 로마 주교는 중요한 조직과 다수의 성직자들을 거느린 지도자로 자리 잡습니다. 당시 주교의 활동 수단과 재원은 수도의 규모에 걸맞게 특별한 수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200년경에는 칼리스투스가 카타콤바에 최초의 공동 기독교 묘역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동방 출신 주교들과 로마의 네트워크

흥미로운 점은 일부 로마 주교들의 영향력이 직분 자체보다는 개인의 인격과 소속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90년 이전의 로마 주교들은 예외 없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방 교회의 주교 연결망에 깊이 통합되어 있었고, 코르넬리우스는 251년 노바티아누스의 분파와 싸우기 위해 로마에서 '대공의회'를 소집하며 바로 이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또 다른 주교들은 로마라는 도시의 중심적 위치와 환대의 전통을 발판 삼아 전례 문제(160년경 아니케투스)나 신학 논쟁(215년경 제피리누스)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교황'이라는 칭호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결정적으로, 당시 로마 교좌는 어떤 특별한 권위도 누리지 못했으며 그 자리에 앉은 사람 역시 '교황'이라는 배타적 칭호를 갖지 못했습니다. "너는 베드로다"라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위임을 스테파노 주교(254~257년)가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조차 규율 문제를 두고 카르타고의 동료 주교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관철시키지 못했습니다. 전임자 빅토르(189~199년) 역시 부활절 날짜 계산 방식을 놓고 아시아 지역의 동료 주교들에게 뜻을 강요하지 못한 바 있습니다.

전환점: 베드로의 교좌가 인정받기 시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조짐은 있었습니다. 250년, 교회의 일치를 다룬 최초의 신학 저술이 베드로의 교좌가 교회 일치의 원천으로서 우선성과 탁월한 지위를 지닌다고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는 훗날 교황제의 발전으로 이어질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로마 주교의 위상이 서서히 특별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