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추종자들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 즉 유대교 안의 하나의 메시아 운동으로 불렸다. 이들이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64년, 로마 대화재 무렵의 일이다. '기독교'라는 명칭의 창시자는 비유대인(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로 여겨지며, 바울은 오랫동안 기독교 반유대주의의 원점으로 지목되어 왔다.
성전 파괴의 공백을 틈타 번진 기독교
기독교화는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132년 예루살렘이 성지로서의 위상을 잃으면서 남겨진 공백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러한 전제는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참 이스라엘'이라 칭하던 소위 '대체 신학'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 연구들은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당시 황금기를 누리던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네트워크를 기독교 선교가 그대로 활용했으며, 회당과 성경에 이미 익숙했던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화된 기독교인'이라는 범주를 한층 확장시킨다. 실제로 초대 교회의 조직은 회당의 조직에서 모델을 따왔고, 반대로 디아스포라 유대교 역시 기독교와의 접촉 속에서 상당 부분 재편되었다.
단절이 아니라 구별의 과정
지역 차원에서 두 공동체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가운데 발전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적대하기도 했지만, 박해기에는 회당이 기독교인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학자들이 확인하는 것은 급격한 단절이 아니라 점진적인 '구별'의 과정이다.
2세기 중반 마르키온이 불러일으킨 기독교의 유대적 뿌리 문제는, 결국 유대 성경을 기독교 정경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매듭지어졌다. 주교들은 동방에서 부활절을 같은 날 함께 지내던 두 공동체를 분리하기 위해 전례와 역법의 차이를 강조했다. 역설적인 제목을 가진 '유대인에 대한 대화록'은 차이를 논박하면서도 교류 자체는 계속 이어갔다.
결국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긴 과정이었으며, 일부 유대교 역사가들은 그 완결을 5세기까지 늦춰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