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교황을 꾸짖은 신비주의자, 시에나의 카타리나

교황을 꾸짖은 신비주의자, 시에나의 카타리나

카타리나는 1347년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에서 염색공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형제자매가 많은 가정의 막내였던 그녀는 6세 무렵 환시를 경험했다고 전합니다. 그녀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아내로 바치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중세의 문헌은 대부분 수도원에 머문 남성들의 손으로 쓰였으며, 여성에게 세 가지 삶의 형태를 제시했습니다. 바로 독신, 결혼, 그리고 과부입니다. 이 위계의 정점에는 수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천사, 나아가 순교자에 가까운 존재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처녀들은 세속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복종·자애·정절의 미덕을 고루 길러야 했습니다. 모든 과잉은 악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교만은 겸손을 무너뜨리고, 삶에 대한 혐오는 자선 실천의 가치를 상쇄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금욕과 고행의 수행

1354년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자, 사람들은 먼저 그녀의 과격함을 탓했습니다. 부모인 야코포와 라파는 딸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카타리나는 12세에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고, 이로써 신랑감을 끌어낼 매력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은둔 과부들의 신앙 공동체인 만텔라테(mantellate)가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17세 때였습니다.

금욕과 고행은 그녀의 일상이자 수행이었습니다. 음식을 입에 담기 전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마른 빵과 생초만으로 연명했습니다. 글을 배우지 못한 그녀는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구술로 남겼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가입한 도미니코회 수녀들의 전통에 따라 가난한 이들과 병자를 향한 자선을 실천했습니다. 그녀의 신비주의적 영성 여정은 도미니코회 사제 토마스 델라 폰테와 토마스 카파리니의 인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조금씩 그녀의 명성은 시에나 시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녀의 활동에 유리한 시대적 배경도 있었습니다. 1348년부터 유럽을 강타해 대륙 인구의 최소 3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은 신벌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짙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벽면에는 '죽음의 춤' 그림이 늘어갔고, 신자들은 하느님의 감시와 응보를 두려워했습니다. 신비주의와 용서가 만개하기 좋은 시대였고, 거룩한 여인은 하느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외교 특사로서의 여정

14세기의 이탈리아 역시 갈등의 시대였습니다. 교황은 1305년부터 아비뇽에 자리를 잡았고, 교황령의 국경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 도시들, 특히 피렌체에 의해 도전받고 있었습니다. 1370년부터 남은 10년의 생애 동안 카타리나는 영적인 일에서처럼 세속의 일에서도 중재자로 나섰습니다. 그녀는 엄격한 관상 생활을 접고 여러 차례의 여정에 올랐습니다.

다만 행동에 나서기 전에 그녀는 종교 심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설교 형제단 총회는 그녀에게 제기된 의혹, 즉 '떠돌아다니는 여인이 어떻게 흠 없는 행실을 지킬 수 있는가'를 놓고 심사했습니다. '방랑하는 여인(mulier girovaga)'이라 불리던 카타리나는 이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1375년 그리스도의 성흔(stigmata)을 받은 뒤, 그녀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베네상 백국으로 향했습니다.

뜻밖에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그녀의 충고를 경청했습니다. 그녀의 목표가 단 하나, 동방에서 튀르크의 진격에 맞서 성 베드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임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로마 귀환을 결심하고 있던 그레고리오 11세는 젊은 여인의 호소에 큰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나아가 피렌체와 교황 사이의 협상 창구까지 열어냈고, 외교가 전쟁을 대체하면서 상황은 호전되었습니다.

1377년 초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년 뒤 아비뇽에서 대립교황이 선출되며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됩니다. 카타리나는 성과의 기복 속에서도 외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여성 영성의 모델

1970년 교회학자로 선포된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서 우리는 저작 『신성 섭리의 대화』(『신학 교리서』라고도 함)를 물려받았습니다.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편지들은 제자들에 의해 필사되어 집본으로 묶였고, 그녀의 사후 널리 유통되며 사상 확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여성 영성의 모델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녀의 고해 사제이자 전기 작가인 카푸아의 라몬드는 그녀가 1380년 33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다만 역사가들은 그리스도의 나이와 우연히 일치하는 이 숫자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수많은 순례자들이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안 그녀의 무덤을 찾았고, 시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더 알아보기

C. 랑세(C. Rancé),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덕의 불꽃』(주석 달린 텍스트 선집), Points 출판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