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시칠리아 만종: 비잔틴의 황금, 한 여인, 그리고 잔혹한 학살

시칠리아 만종: 비잔틴의 황금, 한 여인, 그리고 잔혹한 학살

프랑스 앙주(d'Anjou) 가문의 지배에 맞선 시칠리아 민중의 대봉기, 이른바 '시칠리아 만종(Sicilian Vespers)'은 그리스 세력의 은밀한 개입까지 얽혀 있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봉기는 1266년부터 섬을 점령해 온 프랑스인들에 맞춰 1282년 부활절에 일어났다. 반란은 6주간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프랑스인이 살해되며 앙주 가문의 통치는 크게 흔들렸다.

앙주의 샤를과 비잔틴 제국의 대립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독일 세력이 교황과 그 동맹군에게 패배한 뒤, 시칠리아는 앙주의 샤를(Charles of Anjou)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샤를에게 시칠리아는 어디까지나 발판에 불과했다. 그의 진짜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Michael VIII Palaiologos)가 다스리던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정복이었다.

샤를은 비잔틴 원정을 위해 시칠리아의 모든 자원을 짜내며 섬을 파냈다. 동시에 현지 주민들을 통치에서 철저히 배제해 깊은 반감을 샀다. 미카엘 팔레올로고스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섬에 심어둔 밀정들을 통해 반란의 불씨를 지피고 확산시켰다.

게다가 샤를에게는 또 하나의 강력한 적이 있었다. 바로 아라곤 국왕 페드로(Peter of Aragon)였다. 그의 아내가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적법한 상속권자였기에, 페드로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영토로 여기고 있었다.

봉기의 발발

1282년 3월 30일 오후, 팔레르모 성령교회의 종이 저녁기도(베스퍼스)를 알리며 울렸고, 이것이 곧 봉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술에 취한 프랑스 병사 드루에(Drouet)가 현지 기혼 여성 한 명을 겁탈한 사건이었다.

그 여인의 남편이 칼로 드루에를 공격해 살해했다. 다른 프랑스 병사들이 남편을 덮쳤지만, 시칠리아인들이 몰려나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즉각 반란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모든 교회의 종이 울려 퍼지고, 밀정들의 지휘 아래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인에게 죽음을!"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인과 그 가족이 머물던 여관과 숙소에 난입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심지어 프랑스인과 결혼한 현지 여성들까지, 나아가 프랑스인 신부와 수도사들조차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

날이 밝을 무렵 약 2,000명의 프랑스인이 학살당했고, 봉기군은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봉기는 프랑스 병사들이 무기를 수색한다는 핑계로 시칠리아 여성들을 희롱하면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은 드루에 사건을 언급하면서도, 봉기의 실질적 배후는 미카엘 팔레올로고스의 밀정 요안니스 프로킨다스(Ioannis Procindas)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봉기의 확산과 프랑스 함대의 소멸

팔레르모에서 혁명이 성공한 뒤, 프랑스군이 반응할 새도 없이 봉기는 점차 섬 전역으로 번졌다. 이후 6주 안에 시칠리아 전체가 봉기군의 손에 들어왔는데, 유일하게 방어가 잘 갖춰진 메시나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결국 이 도시마저 4월 28일 내부에서 함락되었고, 봉기군은 그곳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를 불태워 버렸다. 이로써 앙주의 샤를이 품어온 비잔틴 제국 정복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주목할 점은, 오래된 그리스계 공동체 출신 인물 중 한 명인 네오카스트로의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 of Neokastro)가 봉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노바 선원이 항해하는 배에 메시지를 실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그리스 황제 미카엘에게 소식을 전했다.

교황의 거절, 그리고 새로운 왕의 등장

한편 혁명 지도부는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자신들을 인정하고 주군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 출신 교황은 이를 거절했고, 이것이 프랑스 진영의 마지막 실수로 남았다. 결국 시칠리아인들은 아라곤의 페드로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여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페드로는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해 시칠리아의 고유한 관습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며 민심을 얻었다. 그리고 9월 4일, 그는 '시칠리아 왕 페드로 1세'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샤를은 반격을 시도해 시칠리아의 '관문'인 메시나 탈환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미카엘 팔레올로고스는 이 성공에 대해 이렇게 남겼다. "내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신의 도구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비잔틴의 황금은 봉기 계획을 뒷받침했고, 물론 실행은 시칠리아인들의 몫이었다. 그들 다수는 그리스 혈통의 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칠리아 만종: 비잔틴의 황금, 한 여인, 그리고 잔혹한 학살

드루에와 한 여인으로 촉발된 사건을 묘사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