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년 말 무렵, 하노이가 준비한 거대한 기만 작전의 일부는 이미 무대에 올라 있었다. 송베(Song Be), 록닌(Loc Ninh), 닥토(Dak To)에서 벌어진 국경 지대 전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어 1968년 1월 중순, 기만 작전의 또 다른 핵심 축을 펼치기 위한 병력과 화력이 모두 제자리에 배치되었다. 그것은 케산(Khe Sanh)에서의 양동 작전이었다.
작전은 1월 21일, 미군 기지에 대한 박격포와 로켓포, 야포탄의 집중 포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약 11주간 강도의 변화를 거듭하며 지속되었다.
테트를 앞둔 긴장
남베트남에서는 테트 설날이 다가오면서 웨스트모얼랜드 장군과 그의 지휘관들이 느낀 불안감이 남베트남 인사들 사이로 번져나갔다. 웨스트모얼랜드의 압박을 받은 티에우(Thieu) 대통령은 부대에 이미 허가한 테트 휴가를 취소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남베트남군 병력의 절반—당시 약 73만 2천 명 가운데 해당 인원—이 경계 태세를 유지하도록 승인했다.
계획에서 벗어난 조기 공격
그러나 하노이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했음에도, 공격 일정에는 치명적인 오류 하나가 스며들었다. 1월 30일 새벽이 오기 전, 거리마다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며 폭죽을 터뜨리던 시각, 공산군은 중부 고원지대와 중부 연해안 성(省)의 여덟 개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항구 도시 나짱(Nha Trang)에는 대대 규모의 지상 공격이 감행되었고, 해안 근처에 위치한 군청 소재지 호이안(Hoi An) 역시 공격을 받았다. 고원지대의 도시 반메투옷(Ban Me Thuot)에서는 박격포와 로켓포 사격이 보병 공격에 앞서 퍼부어졌다. 다낭(Da Nang)에서는 공병부대가 남베트남군 제1군단 사령부를 상대로 돌파 작전을 개시했다. 꾸이논(Qui Nhon)에 대한 지상 공격에는 두 개 대대가 동원되었는데, 이곳 수비대는 앞서 확보한 선전용 녹음 테이프를 입수한 이후부터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던 참이었다. 이 밖에도 플레이쿠(Pleiku)와 외곽 지역의 한 군청 소재지마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짧았지만 값진 경고
이른바 '조기 공격'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보낸 경고는 짧았지만 결정적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의 정보참모장 필립 B. 데이비슨(Phillip B. Davidson) 소장은 이렇게 예측했다. "후속 공격이 오늘 밤 아니면 내일 아침, 전국 각지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1월 30일이 밝자 티에우 대통령은 전국 단위 휴전을 즉시 취소하고 남베트남군 전 부대에 경계 명령을 내렸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이미 미군 부대에 대해 같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이미 휴가를 떠난 남베트남군 병사들을 불러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민간인 차림으로 도시와 마을에 잠입해, 명절을 맞아 이곳저곳을 오가던 남베트민 군중 속에 섞여 있던 공산군 병력들을 걸러내는 일 역시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