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조이유즈(Joyeuse) 공작령 | 의미와 역사

조이유즈(Joyeuse)는 16세기 프랑스의 귀족 공작령(공국)으로, 그 중심지는 현재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Ardèche) 주에 해당하는 랑그독(Languedoc) 지방의 비바레(Vivarais) 지역에 있는 조이유즈 마을이었습니다.

이 영지는 13세기부터 샤토뇌프 드 랑동 가문(House of Chateauneuf de Randon)의 한 분가가 남작령(Barony)으로 보유했으며, 1432년에는 자작령(Viscounty)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앙리 3세의 총신, 안 드 조이유즈

프랑스 국왕 앙리 3세(Henry III)의 총신이었던 안 드 조이유즈(Anne de Joyeuse, 1561~1587)는 1581년 조이유즈 공작(Duke of Joyeuse)으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왕의 처제인 마르그리트 드 보데몽(Marguerite de Vaudémont)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1582년에는 프랑스 해군 제독(Admiral of France)에, 1586년에는 노르망디(Normandy) 총독에 임명되며 왕실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는 랑그독에서 위그노(Huguenot)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몽모랑시 공작 앙리 1세(Henri I, Duc de Montmorency)의 정책에 맞서 로마 가톨릭 세력의 반발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기옌(Guienne) 지방의 위그노들을 상대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해 몽생텔루아(Mont-Saint-Éloi)에서 일부 위그노들을 학살했으나, 1587년 10월 20일 쿠트라(Coutras)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었습니다.

형제들의 행보와 공작령의 후계

안 드 조이유즈의 생존한 동생들 중 장남이었던 프랑수아(François, 1562~1615)는 1582년 나르본(Narbonne) 대주교, 1583년에는 추기경(Cardinal)에 서임되었고, 이후 1604년에는 루앙(Rouen) 대주교직을 맡았습니다.

안이 사망한 뒤 랑그독 내 가톨릭 강경파의 지도권은 세 번째 동생 앙투안 시피옹(Antoine Scipion)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는 몇 년간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싸웠지만, 1592년 타른(Tarn) 지방의 빌뮈르(Villemur)에서 패배한 후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다음 동생 앙리(Henri, 1567~1608)는 본래 부샤주 백작(Comte de Bouchage)으로 알려졌으나, 1587년 아내가 사망하자 '프레르 앙주(Frère Ange)'라는 이름을 쓰며 카푸친 수사(Capuchin monk)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작령과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수도복을 벗었고, 1596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Henry IV)와 화해하여 프랑스 원수(Marshal of France)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득을 본 그는 1599년 다시 카푸친 수회로 돌아갔습니다.

앙리의 딸 앙리에트 카트린(Henriette Catherine, 1585~1656)은 1599년 몽팽시에 공작 앙리 드 부르봉(Henri de Bourbon, Duke of Montpensier)과 첫 번째 결혼을 하였고, 1611년에는 기즈 공작 샤를 드 로렌(Charles de Lorraine, Duke of Guise)과 재혼했습니다. 조이유즈 공작령은 이후 기즈 가문의 후손들에게 상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