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히스파니올라에서 시작된 대정복

본토가 아닌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정복

아메리카 영토의 정복은 스페인 본토에서 직접 수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의 권력 중심지에서 그토록 방대한 사업을 지휘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원정대가 출발할 수 있는 아메리카 내 기지가 먼저 마련되었습니다.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크 공화국)를 거점으로 정복 사업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남아메리카 북부로 확산되었고, 이후 대륙 전역으로 번져갔습니다.

바로 이 지역들에서 '엔코미엔다(encomienda)'라는 착취 제도가 탄생했으며, 흑인 노예제의 기원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스페인 입법 당국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와 살라망카 학파의 저술 덕분에 곧 원주민에 대한 강제 노역을 금지하는 방침을 내렸고, 그 결과 신체 저항력과 질병—특히 열대성 질환—에 대한 내성이 더 강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유입되면서 대규모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원정

군사적·보급상의 문제가 해결되면 탐사 목적에서 식민화 목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원정대가 출발할 아메리카 내 거점이 우선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초기 항해에서 바하마, 쿠바, 히스파니올라에서 대체로 평화적인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잔혹하고 두려움의 대상이던 카리브족만 예외였는데, 현지 주민들은 본래 순한 성격에 더해 스페인인들이 자신들을 카리브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점 때문에 비교적 쉽게 복속했습니다.

아메리카 정복의 실체

정복의 출발점은 히스파니올라 섬이었습니다. 여기서 정복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남아메리카 북부로, 그리고 이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엔코미엔다 제도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지역들이었으며, 이 제도는 카리브 해 일부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를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흑인 노예제는 일부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아프리카인보다 몸이 약하다고 여기고, 그들의 처지를 덜어주겠다는 잘못되고 온정적인 시도에서 후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 질서는 19세기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푸에르토리코와 자메이카의 정복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쿠바(앤틸리스 제도 중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섬)는 차례로 정복되어 점차 개척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화, 다른 도덕관, 요컨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했고, 이는 그 원점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푸에르토리코는 1508년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자메이카는 1509년 후안 데 에스키벨이 정복했습니다.

이윽고 쿠바과(Cubagua)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상륙하며 이곳이 "인간의 눈이 본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151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에게 병력을 맡겨 섬 서쪽으로 진격하게 했고, 카오나오에서 원주민들을 대량·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을 거쳐 4년 만에 정복을 완수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지역은 '마탄사스(Matanzas, 학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쿠바 정복과 아바나의 건설

1513년 산크리스토발 데 라아바나 마을이 세워졌습니다. 쿠바의 타이노족 추장 하투에이(Hatuey)가 보여준 저항은 전설이 되었지만, 전반적인 저항은 미미했고, 정복이 늦어진 것은 주민들의 적대감보다는 섬의 넓은 면적과 울창한 삼림 때문이었습니다.

쿠바 정복이 마무리되자 히스파니올라에서 일부 정착민들이 건너왔습니다. '원주민 보호자'라는 칭호를 얻게 될 도미니코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훗날 멕시코를 정복할 에르난 코르테스, 중앙아메리카에서 활약할 페드로 데 알바라도, 그리고 코르테스의 부관으로서 누에바에스파냐 정복의 연대기를 남긴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바나는 내륙 입지의 불결함 때문에 1519년 해변으로 옮겨져 재건되었는데, 그곳은 '카레나스'라 불리던 오래된 항구 인근으로, 콜럼버스가 선박을 수리했던 훌륭한 피항지였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파나마의 정복

1509년 알론소 데 오헤다는 파나마 지협 동쪽에 도시를 세우려 했으나, 열악한 위생 환경과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디에고 데 니쿠에사가 지협의 카리브 해안에 세운 놈브레데디오스로 옮겨졌습니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가 총독으로 임명된 뒤 1513년 남쪽 바다(태평양)를 발견했고, 히스파니올라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된 카스티야델오로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누녜스 데 발보아가 세운 식민지는 페드라리아스 다빌라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고, 페드라리아스는 스페인 본토 주민들을 이주시켜 새 관할 구역의 정부 소재지로서 태평양 연안에 파나마 시를 건설했습니다. 누녜스 데 발보아와 페드라리아스의 갈등은 오래지 않아 폭발했고, 페드라리아스는 1519년 발보아를 처형해 버렸습니다. 페드라리아스가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서 수행한 탐사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쪽에 거대한 원주민 제국(페루)과 칠레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카시케 니카라오가 다스리던 중앙아메리카 지역(니카라과)을 정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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