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신분 문제와 노예제 논쟁
원주민에 대한 복음화와 식민지 교육은 정복 사업 초창기부터 원주민의 신분을 둘러싼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카스티야 왕관의 신민이므로 노예로 삼을 수 없는 존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을 경우 상품처럼 취급될 수도 있었다. 아울러 정복자와 원주민 사이의 관계가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도 규정해야 했다. 초기 논쟁은 인디오를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야만인 혹은 불신자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복음화해야 할 이교 민족으로 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섬들에서 금이 풍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게 해준 방식, 즉 노예 무역을 도입하려 했다. 예상되는 이익 때문에 왕실은 콜럼버스의 요청에 동의했지만, 가톨릭 군주 곁에 있던 일부 신학자들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인디오가 이교도이므로 먼저 신앙을 가르쳐야 하며, 이를 명시적으로 거부했을 때에야 비로소 불신자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 끝에 이사벨 여왕은 원주민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예속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스페인 교회가 주도한 복음화
복음화는 스페인 교회가 주도한 과정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대규모 기독교 개종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인디오들의 반응은 지역마다 달랐고 물질적·영적 동기 역시 균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화의 속도와 특성은 지역적 상황에 맞춰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록들을 종합하면 원주민의 기독교화는 멕시코와 페루에서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 반면, 일부 변방 지역에서는 더디게 이루어졌다. 마르코 팔라시오스(Marco Palacios)와 프랭크 새포드(Frank Safford)는 콜롬비아 대서양 연안에 파견된 성직자들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해당 지역의 원주민 공동체가 매우 가난하여 교리전도사(doctrinero)들의 안정적인 생계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인구가 더 많은 페루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를 선택했다.
수도회의 중심 역할
정복과 식민지화 초기 단계에서 수도회들은 원주민 교리교육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으며, 세속 성직자보다 원주민과 관계를 맺는 데 훨씬 적극적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아메리카에서 수도사들의 입지가 확고해졌고, 16세기 말까지 이미 5,000~5,500명의 수도사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메르세다리오회 300명, 프란치스코회 2,200명, 도미니코회 1,670명, 아우구스티노회 470명, 예수회 350명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수도사가 몰리면서 각 수도회는 저마다 고유한 교육 방식과 충성 대상을 앞세워 갈등을 빚었고, 영적 정복 사업을 지역별로 구획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1563년부터 한 행정 구역 안에 새로 세워지는 모든 수도원은 동일한 수도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다만 이 원칙이 전통적으로 자리 잡은 수도원들이 주요 도시에 크고 웅장한 수도원 교구를 유지하는 것까지 제한하지는 못했다.
식민지 교육
왕실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인디오와 메스티소를 위한 학교 설립을 장려하는 한편, 정작 스페인인 자녀들의 교육은 소홀히 다루었다. 산 베르나르도 데 쿠스코(San Bernardo de Cuzco)와 같은 학교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고등교육 분야의 상황은 달랐다. 스페인인이 아닌 사람의 대학 입학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을 위한 교육은 주로 수도회 학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최초의 학교는 1513년 산토도밍고에서 프란치스코회가 수도원 인근에 설립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프란치스코회가 멕시코에 약 200개의 학교를, 도미니코회가 페루에 약 60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일부 기관은 카시케(원주민 추장) 자녀들의 교육에 특화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536년에 설립된 산타 크루스 데 틀라텔롤코(Santa Cruz de Tlatelolco) 학교로, 최대 천 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푸에블라, 보고타, 키토 등지의 학교 설립에 모델이 되었다. 1547년에 설립된 산 후안 데 레트란(Colegio de San Juan de Letrán) 학교는 메스티소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밖에도 프란치스코회가 멕시코에 설립한 기관과 같은 예술·공예 교육기관이 다수 존재했으며, 바스코 데 키로가(Vasco de Quiroga)가 세운 마을 병원에서도 학교 겸 작업장이 운영되었다.
고등교육과 대학의 설립
고등교육의 일부는 수도회, 특히 예수회와 도미니코회가 담당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1551년 멕시코와 리마에 설립된 '마요르(mayor)', 즉 공식 대학은 특정 단과대학이나 수도원에 소속된 '미노르(minor)', 즉 종교 계열 대학들과 구별되었다. 이러한 대학의 설립에는 교황과 국왕의 이중 승인이 필요했다.
최초의 대학은 1538년 산토도밍고에 설립되었으며, 16세기 내내 리마(산마르코스 대학), 라플라타, 라파스, 키토 등에 추가 대학들이 생겨났다. 17세기에는 과테말라에 산카를로스 왕립 교황청 대학(Universidad Real y Pontificia de San Carlos)이 설립되었고, 하베리아나(Javeriana) 대학을 비롯해 키토와 보고타에 두 곳이 새로 세워졌으며, 그 밖에도 쿠스코, 추키사카, 코르도바에 대학들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