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주로 파르티잔 소탕을 목적으로 무장 사단과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부대 중 하나가 바로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스칸데르베그' 사단이었습니다.
알바니아는 1939년 4월 이탈리아에 점령되었습니다. 이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가 차례로 함락되면서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는 코소보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이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꿈꿔온 '대(大)알바니아'라는 야망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보호 아래 알바니아인들은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린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대거 추방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은 이탈리아에 협력했던 알바니아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알바니아 민병대 '발리 콤베타르(Bali Kombëtar)'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무장친위대 알바니아 사단의 탄생
독일은 상당수의 알바니아인을 제13무장산악사단 '한샤르(Handschar)'에 배속시켰습니다. 이 사단은 대부분 보스니아 무슬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복무한 약 1,000명의 알바니아인은 제2연대(훗날 제28연대로 개칭) 제1대대를 이루었습니다. 얼마 뒤 또 다른 500명의 알바니아인이 합류했고, 이를 계기로 독일은 전원이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사단 창설을 결정합니다.
알바니아인 무장친위대 사단은 1944년 4월, 알바니아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 베드리 페야니(Bedri Pejani)의 요청에 따라 오직 코소보에서만 복무한다는 전제 아래 창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단의 공식 명칭은 제21무장산악사단 '스칸데르베그(Skanderbeg)'였습니다.
수많은 자원입대자가 몰렸지만 적합 판정을 받은 이는 6,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기존 '한샤르' 사단 소속 알바니아인 대대가 신생 사단에 통합되었습니다. 5월 1일 사단은 공식적으로 창설되어 제21산악군단에 배속되었고, 장교와 대부분의 부사관은 독일인이 맡았으며 지휘관은 무장친위대 준장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August Schmidhuber)였습니다. 사단 병력은 6,500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병사들은 이탈리아제와 독일제 무기를 혼용했고, 이탈리아 M15/42 전차 1개 대대도 보유했습니다. 편제는 제50·51무장산악연대, 제21산악포병연대, 제21정찰여단, 제21대전차중대, 제21산악공병대대, 제21보급대대, 제21수송대대, 제21위생대대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학살과 약탈의 일색
사단이 창설되자마자 알바니아인 병사들은 세르비아인에 대한 끔찍한 범죄에 매달렸고, 독일군은 결국 사단 내 두 개 대대를 해산하고 관련 알바니아인들을 체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944년 5월 14일에는 프리슈티나의 유대인 가옥들을 습격해 유대인 281명을 체포하여 독일군에 넘겼습니다. 이들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사단 병력은 추축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알바니아인들의 학살에도 가담했습니다.
이들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몬테네그린인 가구 1만 곳을 추방하는 한편, 알바니아인 72,000명의 정착을 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민족 구성이 영구적으로 바뀌었고, 그 후유증은 1999년 코소보 분쟁에서 그 후손들에 의해 정치적 무기로 활용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과 세르비아인 사냥은 계속되었지만, 사실상 이 부대는 약탈·약진·학살·강간만을 일삼는 무장 깡패 집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44년 6월 사단은 첫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는데, 그 와중에도 상황은 악화되어 안드리예비차 마을에서 정교회 신자 400명이 처형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전투 가치 없는 부대
이후 사단은 8월 말까지 반파르티잔 작전에 투입됐지만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사단이 경비 임무 외에는 아무것도 수행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파르티잔과의 교전에서 약 1,000명의 알바니아인이 전사했고, 탈영자는 그보다 더 많았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이 사단이 전투 부대로서 아무 가치가 없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4년 9월 1일에는 사단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일인 장교와 부사관들을 살해했고, 이후 약 3,500명의 알바니아인이 탈영했습니다. 히믈러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리스에서 복무 중이던 독일 해군 병력 3,000~4,000명을 사단에 배속시켰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까지 사단 병력은 4,900명으로 줄었고, 전투 가능 인원은 겨우 1,500명에 불과했습니다. 10월 중순에는 장교 86명, 부사관 467명, 병사 899명만이 남았습니다. 결국 E집단군 사령관 뢰르(Löhr) 장군은 모든 알바니아인 병력의 무장 해제와 동원 해제를 명령했고, 사단은 11월 1일 공식 해체되었습니다. 이후 게릴라들의 보복이 이어져 수천 명의 알바니아인이 살해당했습니다.
사단 병사들은 독일군 군복을 입었지만, 구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군복과 이탈리아군 군복도 함께 입었습니다. 장비 역시 입수 가능한 모든 출처에서 조달했습니다. 사단의 휘장은 알바니아의 상징인 쌍두독수리였습니다.